아기자기 스위트룸
카테고리
작성일
2016. 6. 1. 21:14
작성자
순묵애빛

캐릭터, 다이무스 홀든(사이퍼즈)

스타일, HL 판타지au

 

 

※ 원작 캐릭터와 드림주(자캐)가 엮이는 드림 소설을 싫어하는 분은 열람하지 않는 것을 권장합니다.

※ 캐붕 주의

※ 뱀파이어 소재 사용

합작 원문

 

 

 

 

 

 

 

 

 

 

 

더덕님 커미션

 

 

 

 

 

 시안은 서둘러 배낭을 챙겼다. 방금 막 황제의 허락을 받아냈기 때문이다. 귀한 약품을 쓰는 게 내키진 않았겠지만 소중한 병력이니 어쩔 수 없다. 경쾌한 움직임으로 배낭을 고쳐 멘 시안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전설이나 민담이 아닌 실존하는 뱀파이어는 나라 간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소중한 무기가 되었다. 대부분의 황제들은 전쟁이 터져서야 모습을 드러내 이익을 취하는 영악한 뱀파이어를 힘을 합쳐 물리치기는커녕 그 존재를 하나라도 손에 넣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뱀파이어 한 명이 수십 명에 달하는 군사의 몫을 하기 때문이다. 그 중요한 존재들은 한 나라에 힘을 보태주는 대신 원하는 것을 요구했다. 깨끗한 피를 가진 어린 아이들이나 처녀, 또는 황제의 권력과 부를 탐했다. 무리한 요구라도 황제들은 나라를 위해서라면 수락해야 했고, 뱀파이어들은 정체를 밝힌 존재가 손에 꼽힐 만큼 소수라는 것을 알고 당당하게 행패를 부렸다.

 시안이 살고 있는 나라에도 뱀파이어가 있다. 황제가 가지고 있는 군사의 수는 무역의 중심지인 거대한 나라를 지키기엔 부족한 수였지만 뱀파이어가 있었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값어치가 큰 나라인 만큼 전쟁도 여러 번 치렀는데, 그 뱀파이어는 한 번도 빼지 않고 앞장서서 군사를 지휘하며 싸워주었다. 그런 그가 나라에 요구한 것은 간단했다. 굉장한 것을 요구할 만도 한데 그는 깨끗한 피를 가진 인간도, 막대한 재산도, 권력도 아닌 인간과의 공존을 원했다.

 시안은 어렸을 때 이 이야기를 듣고 동화 속 왕자님 같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타지에 있는 뱀파이어보다 낫다고 생각할지언정 그녀처럼 정을 느끼고 동경하지는 않았다. 모두들 그 뱀파이어 덕분에 살아있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알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그들은 그 존재를 두려워했다. 그런 와중에 시안은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의사가 되었다. 성에서 지내는 뱀파이어와 만날 일이 잦은 일을 당당하게 자처했다. 사람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봐도 그녀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엔 자신의 행동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왔다.

 오늘은 며칠 간 치러진 전투가 끝난 날이었다. 군사의 수가 몇 배나 차이 났음에도 난전 끝에 뱀파이어가 가세하여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만만치 않았기에 무적 같던 뱀파이어도 부상을 입었다. 그가 다친 군사들을 이끌고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그가 다친 것을 보고 놀라기만 하고 직접 치료해주거나 권유하지 않았다. 아예 피하는 이도 있었다. 백발의 뱀파이어는 예상했던 반응인지 아무렇지 않게 황제의 인사를 받으며 성 안으로 사라졌다.

 시안은 그것을 보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얼 척이 없고 사람들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있던 치료를 마무리 지었을 때 그녀는 떨떠름해 하는 황제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뱀파이어는 인간보다 회복이 빠르다네. 저런 상처도 며칠 뒤엔 아물 게다.”

 

 황제는 얼굴이 익숙하지 않은 의사가 뱀파이어를 치료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묻자 어이가 없다는 듯 대답했다. 시안은 평범한 인간이라면 중상으로 입원했을 상처를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는 것 때문에 기가 찼는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내일 당장 일어날지도 모르는 전투에 대비해야 한다며 황제를 설득했다. 그는 미심쩍어했으나 허락해주었다. 시안은 마음을 바꿀 새라 재빨리 약품으로 채운 배낭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

 햇볕이 거의 들지 않는 외곽으로 갈수록 사람의 소리가 줄어들고 쌀쌀해졌다. 시안은 배낭에서 달그락 거리는 것을 들으며 빠른 속도로 걷다가 차오르는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빨리 온 것 같았는데, 설마 그림자도 못 볼 줄이야.”

 

 따라잡진 못하더라도 작은 실루엣은 볼 수 있을 줄 알았던 시안은 걸음을 늦추었다. 호흡이 제법 거칠어졌기에 평소 걷는 속도로 발을 옮기면서 창밖을 보기도 하며 복도를 살폈다. 그곳은 세상에 저 혼자 남은 것 마냥 고요했다. 성의 중앙에서 봤던 창밖의 풍경이 이곳과는 너무 달라서, 그녀는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았다.

 묘한 기분에서 벗어날 즈음, 다른 방들과 같지만 어쩐지 낡은 문이 그녀를 반겼다. 시안은 문 너머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에 그제야 살짝 겁을 먹었지만 자신이 바라왔던 것을 떠올리며 용기를 내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시안은 문 너머로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살짝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의외로 가볍게 열리는 탓에 조금 긴장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건 온 몸이 차게 식을만한 냉기였다. 시안은 살짝 몸을 떨었다. 어쩐지 횅한 방 안을 계속 둘러보아도 백발의 뱀파이어는 찾을 수가 없었다. 들어오라고 대답했던 목소리는 잘못 들은 건지.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의 출처를 찾다가 곧 나타나겠거니 하며 기다리기로 했다.

 방은 굉장히 넓어서, 간단한 가구만 놓인 이곳은 굉장히 비어보였다. 책이 꽉 채워진 책장이 벽 한 면을 메우고 있었지만 없어도 별 차이는 없을 듯 했다. 시안은 들어온 문에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창문을 바라보다가 팔락거리는 소리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밖이 잘 보이는 곳에 놓인 책상 위, 무언가에 눌려 흔들거리는 종이가 있었다. 시안은 이끌리듯 다가가 살펴보았다. 빛바랜 양피지가 잉크병 아래 깔려 바람을 맞아 팔락였다. 활짝 열린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잉크병을 쓰러뜨릴 기세라, 시안은 팔을 뻗어 창문을 닫으려 했다. 책상은 넓고, 창문은 높고, 시안의 키는 작아서 쉽게 손이 닿지 않았다. 그녀는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해서 오기가 생겼는지 포기하지 않고 손을 뻗었다. 책상 위에 올라가면 닫을 수 있겠지만 끝까지 올라가지 않았다. 창문에 열중한 탓에 누군가 다가오고 있는 것도 모르던 시안은 창문을 겨우 닫았을 때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놀라 책상 모서리에 허리를 찧었다.

 

 “괜찮나?”

 

 그녀는 책상 곁에 엎어져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다가 걱정 어린 목소리에 허리를 부여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진정이 되었을 때, 시안은 배낭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라를 수호해주는 분에게 무슨 추태인지. 그녀는 얼굴을 붉히다가 제 앞에 조각상처럼 서 있는 존재를 눈에 담았을 때 화들짝 놀라며 다급히 눈을 가렸다.

 뱀파이어는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나마 걸치고 있는 거라곤 허리에 두른 천 한 장 뿐. 씻고 나왔는지 항상 뻣뻣하게 뒤로 뻗어있던 하얀 머리는 물을 머금은 채 처져 있었고, 온 몸엔 닦이지 않은 물기가 묻어있었다.

 시안은 당황한 나머지 입만 달싹이며 귀까지 빨개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려 숨겼다. 잠시 후 시안은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힘겹게 열었다.

 

 “다, 다친 데는 더 없나요?”

 

 잠시 기다렸지만 대답이 없어서 다시 한 번 물었다. 목소리가 여전히 가늘게 떨렸다.

 

 “외상은, 오른쪽 복부뿐인 거죠? 그 외에 다른 곳이 안 보여서…….”

 “나를 치료하러 온 건가?”

 

 질문과 상관없는 대답에 시안은 어리둥절하다가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뱀파이어는 인간보다 회복 속도가 빨라서 치료하지 않아도 된다만.”

 “그래도 치료는 해야 돼요.”

 

 본인마저 불필요하다고 하자 울컥한 시안은 저도 모르게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금방 낫는다며 치료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온지라 무의식적으로 다그친 그녀는 배낭을 고쳐 들어서야 자신의 경솔함을 자각했다. 불안한 시선으로 흘긋 살피자, 백발의 뱀파이어는 어느 새 옷을 입고─가벼운 소재에 격식을 차린 의상이었다.─ 자신의 침대로 걸어가고 있었다. 시안은 제 실수를 그냥 넘어가는 것 같아서 안심하며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뱀파이어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네? 아, 프러시안입니다. 다들 시안이라고 불러요.”

 

 시안은 대답하면서 배낭 안을 뒤적였다. 깊숙이 숨어버린 소독약을 찾느라 배낭 속에 시선을 고정한 그녀는 빤히 바라보는 다이무스의 시선을 알 리가 없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건가?”

 “네. 맞아요. 군주님은 성함이 다이무스 홀든, 맞죠?”

 

 그에게 시선을 꽂자 뱀파이어, 다이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독약을 꺼내든 시안은 잠시 상의를 들어달라고 했다. 그는 군말 없이 순순히 따라주었다.

 

 “아, 하마터면 여기 다 썩을 뻔 했어요. 치료는 안 한다 한들 소독은 하셔야 돼요.”

 

 안 그러면 피부가 썩을 거예요. 뱀파이어는 어쨌든 인간을 닮았기에, 증상도 인간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던 시안은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자 한숨을 쉬었다.

 

 “전에도 이렇게 다친 적 있었죠? 그때도 이렇게 놔뒀어요?”

 

 시안은 작은 손으로 열심히 치료하면서 물었다. 과거를 떠올리듯 잠시 말이 없던 다이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안은 저도 모르게 불퉁한 표정으로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회복 속도가 빠르다고 해서 그냥 놔두면 안 돼요. 회복이 영영 안 될 수도 있다고요. 앞으로는 다치면 저를 찾아오세요.”

 

 아셨죠? 시안은 깔끔하게 두른 붕대를 매듭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다이무스는 생기 없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너무 말이 많았던 건 아닌지 걱정한 시안은 당황하며 시선을 내렸다.

 

 “아, 쓸 데 없는 참견이었다면 죄송합─”

 “아니다.”

 

 그녀가 서둘러 사과하자 다이무스가 조금 빠른 어조로 말을 막았다.

 

 “치료 고맙다.”

 

 여전히 딱딱한 목소리였지만 조금의 부드러움과 호의가 담겨있어서 시안은 슬쩍 그를 바라보았다. 너그러운 눈을 한 다이무스가 그녀를 가만히 마주했다. 시안은 그제야 활짝 웃으며 당연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침대 위와 바닥에 널브러진 약품을 정리하다가 며칠은 두고 봐야하니 무리하지 말라며 신신당부 했다.

 

 “상처가 벌어지거나, 두통이 있거나, 어쨌든 몸이 안 좋은 것 같으면 넘기지 말고 절 찾아오셔야 해요.”

 “그래.”

 

 자신의 경고에 성의 없게 대답하는 그가 못미더웠는지 시안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음, 아니면 제가 올게요.”

 “의사는 바쁘지 않은가.”

 

 어쩐지 들떠서 제안하는 시안에게 그는 조용히 물었다.

 시안은 푸스스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바쁘긴 하지만, 그렇게 시간이 없지는 않거든요.”

 

 당당하게 말하긴 했지만 이번 전투에서 다친 사람이 많아서 전보다 바빠질 터였다. 그럼에도 다이무스를 치료하는 걸 관두고 싶지 않은 그녀였기에 어떻게 해서든 오리라 다짐했다.

 

 “언제 시간 되세요?”

 “네가 오고 싶을 때 오면 된다.”

 

 시안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무스가 의문을 표하자 아무것도 아니라며 시간이 되면 꼭 오겠다고 했다. 시안은 다이무스에게 무리하면 안 된다고 재차 강조한 뒤 인사를 끝으로 방을 나섰다. 병실과 거리가 있기 때문에 생각할 시간이 생겼다. 그녀는 조금 전에 떠오른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나라의 유일무이한 뱀파이어는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지 않으면 자신의 방에서 나오는 일이 거의 없다고 했다. 시안은 그의 방 한 면을 가득 채운 책을 떠올렸다. 시간이 남아서 그 많은 책을 읽고, 책에 관심을 쏟는 건 아닌지……. 그녀는 그 소문이 사실임을 깨닫고 의문을 느꼈다. 그는 어째서 방 안에만 있는 걸까? 그 공존이 이런 식은 아닐 터였다.

 이 강한 뱀파이어는 큰 나라를 지켜오면서 단 한 번도 무리한 요구를 한 적이 ─적어도 시안이 알고 있는 바로는─없었다. 그가 바란 것은 오직 인간과의 공존. 아주 단순한 요구였지만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뱀파이어라는 존재를 두려워했다. 그들을 사용하다시피 하는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힘으로는 죽이기 힘들고, 인간보다 몇 배는 강하며, 인간이라면 즉사 할 치명상을 입어도 며칠 후면 말끔하게 낫는다. 무엇보다 뱀파이어의 주식은 인간의 피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먹이사슬 바로 아래라고 생각하여 언제든지 해를 입을 수 있다고 믿는 인간들은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시안도 인정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이제는 다른 뱀파이어라면 몰라도 자신들의 나라를 지키며 싸워주는 다이무스에겐 마음을 열 때가 되지 않았나 싶었다. 그에게 고마워하고 동경하며 숭배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좋은 말을 건네지 않아도 고맙다는 인사나 걱정 한 번은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모두 하나 같이 그가 독이 있는 가시라도 되는 마냥 두려워하고 피해 다니기만 했다.

 이런 상태가 변함없이, 다이무스가 이 나라를 수호해줄 때부터 지속되었다면 그는 이미 포기하지 않았을까 싶은 시안이었다. 아직까지 떠나지 않고 열심히 싸워주고 이곳에 남아있는 게 책임감 때문일 수도 있다고 여겼다. 시안은 자신이 그 상황에 처한 것처럼 눈물을 글썽였다. 혼자서라도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  *  *  *  *

 

 

 

 다음 날, 시안은 어스름이 되어서야 뱀파이어를 찾아왔다. 다이무스는 시안이 문 앞에 도착하자 손수 문을 열어주었다. 뭔가를 쓰고 있었는지 책상에는 양피지가 이리저리 널려있었다. 그것에 슬쩍 시선을 던졌던 시안은 그가 의자를 들어 침대 앞으로 옮기고 그 위에 앉는 것을 보곤 천천히 다가갔다.

 다이무스는 제 옆에 온 그녀에게 바닥을 보인 손으로 침대를 가리키며 앉기를 권했다.

 

 “아, 그래도…….”

 

 시안이 당황하며 머뭇거리자 그는 시안의 손목을 잡아 끌어 검붉은 이불 위에 앉혔다. 얼떨결에 푹신한 침대 위에 앉게 된 시안은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좀 더 일찍 오고 싶었는데 일이 좀 바빠서 늦었어요. 몸은 좀 어떠세요?”

 “괜찮다. 그러는 너야말로 괜찮은가? 피곤해 보인다만.”

 

 시안은 굉장히 단순한 대답과 의외의 질문을 받자 눈썹 한 쪽을 올렸다. 바쁘게 일하고 끝나는 대로 그에게 온 것이기에 잘 틈이 없었던 시안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상상하는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피곤하다는 걸 간단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초췌했다.

 

 “괜찮아요. 한창 바쁠 시기잖아요. 의사라는 게 원래 바쁘기도 하고.”

 

 걱정하지 마세요. 시안은 괜찮다는 뜻으로 슬쩍 웃어보였다.

 다이무스는 뭔가 할 말이 많아보였지만 입을 다물었다. 시안은 그것을 알지 못한 채 그의 복부에 둘러진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었다. 흉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시안은 깜짝 놀랐다. 스물 네 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상처는 혼자 시간을 껑충 뛰어넘은 듯 많이 회복 되어있었다. 뱀파이어의 회복력이 좋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 그녀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정말 빠르네요.”

 “뱀파이어는 처음 치료해보는 건가?”

 

 배낭을 뒤적이며 소독약을 찾던 시안은 앞에서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래서 많이 신기해요.”

 

 당연한 것이었지만 시안은 자연스럽게 대답해주었다. 다이무스는 그녀가 대답하기 전에 쓸 데 없는 질문이었다는 걸 깨닫고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당연한 것이로군. 우문이었다.”

 

 시안은 그가 어쩐지 가르침 받는 어린 아이가 제 말을 정정하는 것 같아서 살짝 웃었다.

 

 “아니에요. 물어볼 수도 있는 거죠.”

 

 시안은 그의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바를 때도 옅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다이무스는 뱀파이어인 자신을 겁먹지 않은 태도로 대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평범한 인간을 대하듯 자신에겐 통하지 않을 약까지 발라줘서 필요 없다고 말하려던 그는 입을 다물었다. 시안은 알고 있음에도 방심하면 안 된다며 끝까지 발라주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편견 없이 한 인간을 대하듯 해주는 게 좋았기 때문에, 다이무스는 깨닫기 하고 싶지 않았다.

 시안은 약을 다 바르고 붕대를 집다가 시선이 느껴지자 고개를 들었다. 어제도 마주쳤던 적갈색의 눈이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모습에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물었다.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다이무스는 고개를 저었다. 갸웃거리는 시안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는 내가 두렵지 않은가?”

 

 어딘가 긴장되어 굳어진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묻자 시안은 질문의 의도를 눈치 채고 싱긋 웃었다. 그는 인간들이 처음부터 변함없이 지금까지도 자신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어제 막 통성명을 한 작은 인간은 두려워하지 않고 평범하게 행동하고 있다. 그로서는 이상하고 어색했을 것이다. 시안은 이해한다는 듯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저는 어렸을 때 다이무스님의 얘기를 들으면서도 무서워하지 않았어요. 나라의 기사님들처럼 앞서서 우리를 지켜주신 분이잖아요. 이 큰 나라를 무리한 대가 없이 말이에요. 제가 생각하는 게 어디까지나 제 상상이고 틀릴 수도 있었지만…… 방금 질문으로 확신했어요. 다이무스님은 두려워 할 존재가 아니에요.”

 

 살짝 흔들리는 시선으로 마주쳐오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시안은 쑥스럽게 웃어보이곤 붕대를 마저 감아주었다. 붕대의 매듭을 지을 때 쯤, 그녀는 문득 힘이 빠진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아, 주제 넘는…….”

 

 시안은 어째선지 친숙하고 편한 느낌에 자꾸만 서로의 입장을 잊어버려 실수를 저질렀다. 다이무스는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거리낌 없이 대해주는 게 편했기에.

 다이무스는 슬쩍 웃으며 말했다.

 

 “뒤늦게 깨닫는 편이군.”

 “하하,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다.”

 

 시안은 굉장히 무례했을 자신의 언행을 순순히 받아들이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뱀파이어를 올려다보았다. 다이무스는 놀란 토끼눈을 한 그녀를 바라보다가 순간적인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 등받이를 가볍게 잡아들고 책상으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안은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가 아닌 것을 자각하고 약품을 챙겼다.

 

 “붕대는 언제 풀어야 하지?”

 “내일도 와서 봐드릴게요. 아마 내일이면 풀어도 될 텐데 일단 경과를 봐야 하거든요.”

 

 시안의 대답에 다이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도 이 시간에 오는 건가?”

 “음, 잘 모르겠어요. 지금도 겨우 온 거라…….”

 

 시안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다음 전투가 당장 내일일 수도 있어서 한 시라도 빨리 하나라도 많은 군사를 돌봐줘야 했다. 다이무스는 시안이 쉬어야 할 시간에 자신을 만나러왔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두루뭉술한 생각들을 정리하며 문으로 달려가는 시안의 뒷모습을 빤히 주시하던 그는 그녀가 문을 열며 뒤를 돌아보자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언제 올지 모르니까 기다리지 마세요. 아, 당연히 무리하시면 안 돼요!”

 

 시안은 바쁜 와중에도 대답을 듣기 위해 열린 문고리를 잡고 그를 주시했다. 그녀는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활짝 웃으며 짧은 인사와 함께 열린 문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부드러운 사람이다. 말 수가 좀 적긴 하지만. 시안은 그와 조금 더 친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신이 나서 제 본분을 잠시 잊었던 그녀는 복도 근처에서 자신을 부르며 다급히 다가오는 하인의 말에 표정을 굳히고 그를 따라 달려갔다.

 다이무스는 그녀가 나가고 닫힌 문을 뚫어질 듯 바라봤다. 그 너머가 보이기라도 하는 마냥 눈도 깜빡이지 않던 그는 시안의 발소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자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특이한 인간이다. 시안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뱀파이어인 그에 대한 두려움이라곤 전혀 없었고 치료가 필요하지 않은 그에게 감히 잔소리까지 하면서 정성을 다해 치료해주었다. 다이무스는 옷 아래 느껴지는 붕대 위에 손을 올렸다. 더 이상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부근에서 미지근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 했다.

 

 

 

*  *  *  *  *

 

 

 

 지난 며칠 간 시안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이무스를 찾아갔다. 듣던 대로 경이로운 속도로 아물어가는 흉터에 감탄하면서 꼬박꼬박 붕대를 갈고 소독을 해주었다. 그녀의 정성어린 보살핌 덕분인지 다이무스의 상처는 흉 지지 않고 깨끗하게 나아갔다. 아마도 곧 치료가 끝난다. 사실 뱀파이어를 상대로 일주일씩이나 간호를 해 줄 필요는 없었지만 치료해주는 의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치료받는 뱀파이어는 거부하지 않았다.

 시안은 이제 하루 일과라도 된 것처럼 시간이 생기자 배낭을 챙겨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그를 만날 구실이 사라지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신이 찾아가지 않으면 그는 끝났을지도 모르는 전쟁을 기다리며 방에서 홀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한다. 시안과 다이무스는 계급과 역할이 달랐기 때문에 사적으로 만나려면 서로를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시안에게만 좋지 않은 영향이 간다. 그럼에도 시안은 그를 혼자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불필요한 행동이었지만 그녀는 성 외곽에 자리한 싸늘한 방,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고요한 복도,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책, 열린 창밖을 바라보며 시간을 때우곤 했던 다이무스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시안이 항상 지나던 복도에 다다랐을 때, 그곳은 매우 소란스러웠다.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로 지나가려던 시안은 그 중심에 서 있는 다이무스를 발견하곤 자리에 멈춰 섰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는데,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이었지만 어딘가 씁쓸해보였다. 시안은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상황을 이해하려고 했다.

 원망과 분노가 가득 찬 눈으로 뱀파이어를 주시하면서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하인이 서너 명, 설움을 토해내듯 목소리를 높이는 하인이 한 명, 그녀를 말리면서 군주의 눈치를 살피는 군사가 두어 명,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미동 없이 서있는 뱀파이어 군주, 다이무스. 그런 그들을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지켜보며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는 군사와 하인들이 있었다. 시안은 사람들의 동태를 살폈다.

 다이무스의 방을 청소하는 하인 중 한 명이 죽었더랬다. 하인들은 뱀파이어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어째서 그가 의심 받는 거지? 시안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안만큼은 그가 범인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녀 역시 그에 관해 아는 게 거의 없어서 장담하지 못했지만 상황을 조금씩 파악하면서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범인이 아니다. 사실을 알고 있는 그녀만이 유일하게 편견 없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시안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듣기만 했다. 한 번, 다이무스가 사람들 틈에 섞여있는 시안을 발견했다. 집중하고 있던 그녀는 그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는 사실도 모른 채 떨리는 목소리로 분노를 터뜨리는 하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하인의 말에 따르면 다이무스의 방을 청소해주던 하인이 며칠 전 죽었다. 그는 하루 동안 보이지 않더니 그 날 저녁 뱀파이어 군주의 방 근처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성에서 하인이 죽으면 재빨리 치워버리기 때문에 정확히 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그저 그의 방 근처에서 발견되었고, 그곳은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몰아붙이고 있음에도 반박하는 사람 한 명 없었다. 그의 밑에서 일하는 군사와 알만한 의사조차도 악을 쓰는 여자를 말리기만 할 뿐, 사실을 짚어주거나 다이무스를 대변해주지 않았다. 모두들 그러려니 하는 것이다. 뱀파이어는 살아있는 생물의 피를 마시기 때문에 언제든지 그럴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다. 뱀파이어가 범인이 아니면 아닌 거고,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중요한 존재이므로 처벌받지 않을 걸 알기에 그를 보호해줄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이다.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사람들의 태도에 화가 난 시안은 당차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주위가 조용해지고 호기심어린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아직 머릿속이 정리 되지 않았고 부담감과 분노에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녀는 의외로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다이무스님은 범인이 아니에요.”

 

 목소리가 떨렸지만 시안은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지금쯤 바쁘게 움직이고 있어야 할 의사가 나타나 대뜸 뱀파이어의 편을 들자 다들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시안은 예상한 상황이라 흔들리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다이무스도 그녀를 놀란 시선으로 주시했지만 그를 등지고 선 시안이 알 리 없었다.

 

 “그 때 다이무스님은 방에 있었어요.”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시안의 말을 들은 하인이 날카롭게 받아쳤다.

 떨림을 멈추고자 꾹 쥔 손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시안은 조용히 심호흡을 하며 손을 쥐었다 폈다.

 

 “저는 의사입니다. 부상을 입은 사람을 돌보는 것이 제 일이죠.”

 “그래서요? 당신이 저 뱀파이어를 치료하기라도 했단 말이에요?”

 “네.”

 

 의사의 당당한 대답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치료가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뱀파이어를 귀한 약까지 써가며 돌봐줬다는 걸 당연한 일을 했다는 것 마냥 태연한 어조로 말한 시안은 따지고 들던 하인이 황당함에 입만 달싹거리자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리고 어제 그 분의 시체를 수습한 건 저예요.”

 “시안님, 그걸 발언하시는 건…….”

 “괜찮아요.”

 

 방금 전까지 군사의 옆에서 어물거리던 의사가 말을 막자 시안은 손을 들어 저지했다.

 성 안에서 시체를 처리하는 건 대부분 의사가 맡는다. 경위를 조사하고 처리하기 위해서인데 그것을 다른 이에게 언급하는 건 ─설령 가족이라 해도─금지되어 있다. 시안은 그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다이무스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금기사항을 입에 올렸다.

 

 “정확한 사인은 갑작스런 심장 발작에 의한 쇼크사입니다. 사망 시각은 오후 8시 경. 그 때 다이무스님은 방에서 저에게 치료를 받고 있었어요.”

 “그, 그걸로 범인이 아니라는 건─”

 “그렇죠. 하지만 범인이라는 증거도 없잖아요?”

 

 이 분이 무엇 때문에 인간의 원망을 받을 짓을 하시겠어요. 충동적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키며 시안은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얘기가 끝난 것 같으니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안 돼!”

 

 그녀가 다이무스를 데리고 자리를 벗어나려 하자 하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시안은 덜덜 떨리는 손을 꽉 쥐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얼마나 무례한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고 계신 것 같네요.”

 

 확실치 않은 사실만으로 감히 군주께 소리를 지르고 범인으로 몰았어요. 시안이 냉정하게 사실을 짚어주자 그제야 주제 파악을 한 하인은 입을 다물었다. 시안은 분노어린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훑고는 조용히 읊조렸다.

 

 “오늘 있었던 일은 황제 폐하께 빠짐없이 보고 하겠습니다.”

 

 그녀는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동상처럼 서 있던 다이무스와 자리를 벗어났다. 하도 꼼짝 않고 서 있던 터라 안 움직이는 건 아닌지 걱정했지만 다행히 이끄는 대로 잘 따라와 주었다.

 그들은 걸어가면서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다이무스는 당찬 걸음으로 서둘러 걸어가는 시안의 보폭을 여유롭게 맞추며 따라갔다. 자신을 이끄는 작은 손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이 편안해서 평소라면 이질적이라 싫어했을 인간의 온기를 얌전히 받아들였다. 그는 맞잡은 손이 떨리는 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이후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간에 그를 감싸주었다. 언젠가부터 포기하고 있던 그의 소망이 희망을 찾았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시안의 존재가 그에게 어떻게 각인 되었는지는 다이무스 본인도 깨닫지 못했다.

 성 외곽, 맨 끝에 자리한 서늘한 방에 도착했을 때는 다이무스가 앞장섰다. 그는 시안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침대에 앉혀주었다. 그리곤 창가에 있던 나무 의자를 가져와 그 앞에 앉았다. 시안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어깨에 걸려있던 배낭끈이 기분을 표현하듯 힘없이 처졌다. 그녀는 다이무스가 앞에 앉자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이해가 안 돼요. 다들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어요.”

 

 시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뭐라 말 하려던 다이무스는 푸른 머리 아래로 보이는 붉어진 눈가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시안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너는 나를 동정하는 건가?”

 

 입을 다문 채로 그의 옷을 살짝 들고 붕대를 풀어 상처를 살피던 시안은 그의 물음에 눈을 굴려 시선을 맞췄다.

 다이무스는 그 사단에서 자신을 도와준 이유를 묻고 있었다. 그의 눈은 평소처럼 올곧았지만 조금씩 떨렸다. 시안은 그가 가지고 있는 긴장을 읽고 입을 달싹였다. 질문을 한 의도는 자세히 모르지만 그의 기분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물론 그녀는 동정하여 도와준 것이 아니다. 하지만 다이무스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시안은 자신이 나서서 도와줄 때 그가 느꼈던 감정, 이런 질문을 하는 그의 감정에 동화된 것 마냥 울컥 설움이 밀려왔다. 그녀는 터지려는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어요. 얼토당토 않는 이유로 살인자라 추궁 받고 있는데, 대변해줄 사람이 저 밖에 없는데…… 어떻게 안 도와요? 그리고…….”

 

 억누른 채로 말을 잇던 시안은 말하면서 목이 울리고 눈앞이 흐려지자 말을 멈췄다. 참으려고 해도 점점 차오르는 서운함과 이기적인 인간에 대한 분노 때문에 결국 눈물을 보였다.

 

 “다이무스님은 마땅한 대우를 받아야 해요. 뱀파이어라서, 군주라서가 아닌 한 명의 주민으로서 말이에요. 그건 당연한 거예요. 물론 뱀파이어라는 존재의 살아가는 방식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그건 모두가 머리를 맞대어 생각하고 조금만 힘을 보태면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봐요. 시안이 씁쓸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굵은 눈물이 붉어진 볼을 타고 뚝뚝 흘렀다. 붕대를 꾹 쥔 두 손은 계속 흘러내리는 미지근한 물을 닦으려 하지 않고 무릎 위에서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다들 너무해요. 그냥 겁이 많거나 경계하는 걸 수도 있겠죠. 하지만 변화가 없잖아요. 다치면서까지 전장에 앞장서고, 주민들에게 위해를 끼친 적도 없는데 어째서 다이무스님은 인간의 호의를 받지 못하는 걸까요? 아니, 못 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안 하는 거죠. 다들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될 텐데.”

 

 시안은 서러움을 참지 못하고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작은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는 이미 터져버린 눈물을 바로 멈출 수는 없음에도 어떻게든 멈춰보려는 이성 때문에 속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삼켰다. 입에 막혀 끅끅거리는 소리는 시안의 목을 아프게 때리고 사라졌다.

 다이무스는 제 일이 아닌데도 제 일인 양 서럽게 우는 그녀를 어떻게 해야 될지 몰랐다. 그는 시안의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고마움을 느꼈다. 시안은 보잘 것 없는 자신을 위해서 나서주었다. 그 사실은 딱딱하게 굳은 중심부에 따뜻한 감정을 피어오르게 했다.

 

 “친절하군.”

 

 누그러진 목소리로 내뱉는 순수한 감탄사에 시안은 고개를 들어 다이무스를 바라보았다. 눈물로 인해 시야가 흐려 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웃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면서 눈가에 고인 물을 흘려보내고, 불규칙한 호흡으로 울먹거리는 그녀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주시하던 다이무스는 시안이 제 이름을 올려 부르자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감쌌다.

 

 “고맙게 생각한다.”

 

 차가운 감촉에 흠칫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시안은 아직까지 흐린 시야에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한 쪽 눈으로 그림자가 가까워지자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쪽,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차가운 입술이 미지근한 눈꺼풀에 닿았다 떨어졌다. 이제야 완전히 맑아진 시야로 멍하니 상황을 파악한 시안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시안은 방금 전 벌어진 일과 이제까지의 성숙하지 못한 자신의 행동을 곱씹으면서 배낭을 챙겨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다이무스가 말릴 새도 없이 방을 달려 나왔다.

 다이무스가 달래주었다. 차가운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시안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면서 자꾸만 떠오르는 그의 체온과 손길에 얼굴이 점점 더 뜨거워졌다. 생각할 때마다 주르륵 따라오는 감각들이 그녀를 부끄럽게 했다. 다음엔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노을 진 저녁 하늘처럼 새빨갛게 열이 오른 시안의 얼굴은 좀처럼 식지 않았다.

 다이무스는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서 시안이 뛰쳐나간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의 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무의식적으로 벌린 일이라 걱정이 앞섰다. 안 만나려고 하면 어쩌지, 상처 받아서 피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 그의 머릿속을 채웠다. 죄 많은 손으로 상기된 얼굴을 감쌌다. 허황된 꿈을 내뱉던 입으로 부드러운 눈꺼풀에 키스를 했다. 다이무스는 무릎에 팔꿈치를 올리고 고개를 숙여 제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과 입술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다. 시안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잡고 싶다. 잃고 싶지 않다. 갖고 싶다─. 제 일인 양 서럽게 울 정도로 그를 헤아려준 인간이다. 그녀의 태도가 그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다이무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생각할수록 이미 멈춰버린 심장 언저리가 간질거렸다. 손을 쥐었다가 펼쳤다. 각인된 듯 그녀의 온기가 떠나지 않고 손 안에 머물렀다. 다이무스는 끓어오르는 어느 감정을 느끼곤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위로 쓰러졌다.

 

 “시안.”

 

 힘주어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다이무스는 미간을 좁혔다. 목이 바짝 말랐다. 피를 마시지 못한 식욕이 아니다. 시안, 그녀에 대한 갈망이다. 다이무스는 천천히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  *  *  *  *

 

 

 

 시안은 한동안 다이무스를 만나지 못했다. 치료가 끝났기에 그를 찾아가야 할 이유도 없었거니와 저번의 일 때문에 예전처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가 겨우 마음을 다잡고 그때의 갑작스러운 행동과 범해버린 실례에 대한 된 사과를 하기 위해 찾아 가려고 했을 땐 전쟁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상대에도 뱀파이어가 있다고 했다. 군사의 수가 배로 밀리기 때문에 매우 힘겨운 전투가 될 것이다. 시안은 불안한 마음으로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랐다.

 두 사람이 어색하게 헤어지고서 엿새가 지났을 때 다이무스가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며칠 밤을 지새우며 기다리던 시안은 밀린 잠을 자느라 돌아오는 다이무스를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찾아온 의사가 깨우러 와서야 일어났다. 시안을 찾아온 남자는 매우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시안이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묻자 머뭇거리며 말했다.

 

 “군주님이 너를 찾으셔.”

 “응?”

 

 군주라면 그녀가 아는 그 군주를 말하는 걸까? 시안이 반문하자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 알잖아. 뱀파이어. 그 분이 너를 호명하셨대. 자세한 건 모르겠어. 치료가 필요하다고─”

 “많이 다치셨어?”

 

 전쟁이 끝난 것이다. 그제야 알아차린 시안은 다이무스가 심하게 다쳐서 자신을 찾는 줄 알고 다급하게 배낭을 챙기며 물었다. 남자는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음, 잘 모르겠어. 말만 전달 받았거든.”

 “알았어. 다녀올게. 고마워!”

 

 빠르게 방을 나서는 시안의 등 뒤에 남자는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해주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안은 서둘러 발을 옮겼다. 자느라 돌아오는 것을 못 봤다. 많이 다쳤을까? 불안한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채웠다.

 아직 마음이 정리되지 않은 시안은 그의 상태만 보고 최대한 피해 다니려고 했다. 다쳤다는 말에 그 생각을 까맣게 잊어버렸지만 피해 다니는 데 성공했어도 다이무스가 권력을 이용해 직접 호출할 생각이라는 걸 시안은 모르고 있었다.

 시안이 다이무스의 방에 다다랐을 때, 다이무스는 문을 등지고 침대 앞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있었다. 무엇을 하는지 어깨가 조금씩 움칫거렸다. 시안은 배낭을 고쳐 메며 그에게 다가갔다.

 

 “빨리 왔군.”

 

 그는 자신의 상처를 소독하고 있었는데 다친 곳이 한둘이 아니었고 하나같이 살점이 떨어졌거나 찢어져 있었다. 저번보다 심한 상처에 시안은 경악하며 서둘러 솜과 소독약을 꺼냈다. 다이무스는 그녀가 손을 뻗자 자신의 손을 치웠다. 시안은 말없이 집중해서 그를 치료해주었고,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꼼꼼히 치료해주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불편해하는 기색은 없다. 자신이 다쳤다는 소리에 이마에 구슬땀이 맺힐 정도로 달려왔다. 그 사실만으로도 기뻐서 다이무스는 옅게 웃었다.

 

 “더 다친 곳은 없죠?”

 

 보이는 곳은 모두 치료한 시안이 침대에 앉으며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시안은 두 손을 모아 무릎 위에 올리고 상처를 살피다가 속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렇게 많이 다치셨어요.”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그녀가 눈에 들어오자 다이무스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가 웃는 것을 처음 본 시안은 약품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다이무스가 눈을 마주치며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시안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둘러대다가 갑자기 그 때의 기억이 떠올라 얼굴을 붉혔다. 부끄러운 기억이 떠올라서 그녀는 한 시라도 빨리 그가 안 보이는 곳으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다이무스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를 옭아맸다.

 

 “자다왔나?”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던 시안은 물음표를 띄웠다. 다이무스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말을 이었다.

 

 “머리가 뻗쳐있다만.”

 

 눈도 조금 부은 것 같군.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에 시안은 그제야 상태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나왔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녀는 이젠 정말로 나가지 않으면 이대로 얼굴이 터져버릴 것 같다는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앗!”

 

 시안이 나가려 하는 것을 알아차린 다이무스가 빠른 움직임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침대 위로 쓰러졌다. 순식간에 그의 품에 안겨 누워버린 자세가 되자 시안은 안 그래도 붉은 얼굴을 더욱 빨갛게 물들이며 버둥거렸다. 다이무스는 그녀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 시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놔달라고 하자 다이무스는 더욱 품에 밀착시키기만 할 뿐이었다.

 

 “며칠 밤을 샜나? 잠이 부족한 것 같은데.”

 

 다이무스가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그렇긴 해요…….”

 “나도 그렇다. 그러니 한숨 자도록 하지.”

 “저는, 저, 전 괜찮은─”

 “쉿.”

 

 어떻게든 빠져나갈 궁리를 하던 시안은 결국 입을 꾹 다물고 몸에 긴장을 풀었다. 정말 이대로 자려는 모양인지 다이무스는 눈을 감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시안은 멀뚱히 눈을 깜빡였다. 서늘한 품과 듬직한 품이 편안했다. 든든한 그가 방금 전엔 투정부리는 어린 아이 같았다고 시안은 생각했다. 그녀는 작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다이무스는 품 안에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와 부드러운 감촉에 안정감을 느꼈다. 제 안에서 색색 소리를 내며 잠든 시안을 좀 더 가까이 끌어안으며 그 또한 깊은 안식에 의식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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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네 번은 갈아엎었던 것 같다.

초반에, 이렇게 쓰고 저렇게 쓰고...

설정도 바꾸고 플롯도 바꾸고.

아주 이것저것 바꾸다가 1~2주 정도는 초반에만 쏟아붓다가 이후 틀이 잡힌 뒤 2주 정도는 틈틈이 썼다.

4주 정도 걸렸던 듯.

아주 예전에 소설을 즐겨쓰면서 장편소설을 썼을 때처럼 같은 주제의 이야기를 쓴 건 오랜만이다.

약 14000자라니... 허허.

 

예전엔 쓰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장편, 중편을 기획해서 초반에 쓰다가

제 풀에 지쳐 관두곤 했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쓰면 된다는 걸 스스로 배웠달까.

예전엔, 그냥 막 정말 전형적인, 딱딱한 틀에 박힌 글만 썼다면

이제야 조금씩 조금씩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유순하게 쓰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영재원 다니고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이 다... 그런 거다보니.

이젠 내가 쓰고 싶은 부분만 쓰기도 하고 쓰고 싶은 대로 쓰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넘나 조아

아 좋아서 뭐라는 거닞 모르겟ㅆ따~!!~!~~!!~

 

암튼 재밌었습니다.

판타지 드림 합작 재밌었어요!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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