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자기 스위트룸
카테고리
작성일
2022. 2. 10. 22:13
작성자
순묵애빛

※ 원작 캐릭터와 자작 캐릭터가 엮이는 드림

드림에 거부감이 있으시면 뒤로 가기 해주세요

 

+) 타 사이트에 개시했던 걸 옮김

 

 

 

 

Photo by Tony Lee on Unsplash

 

 

 

 

 

 

 

 

 얼마 전, 웨인 엔터프라이즈 본사 앞에 카페가 생겼다. 카페의 이름은 메르헨(Merchen). 낭만적인 이름처럼 메르헨은 콘셉트를 동화로 잡았다. 삭막한 고담에 어울리지 않는 유치한 센스에 사람들은 웨인의 색다른 돈 지랄이라 일갈했지만 호기심에 한 번 방문한 이후로는 이곳이 칙칙한 고담을 빛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 꼭 뭐에 홀린 사람처럼.

 메르헨 카페는 바깥에서 보아도 환상적이었다. 이상한 나라에 흘러 들어갔던 앨리스가 케이크를 먹었던 장소가 바로 이럴 거라는 생각이 들 만큼. 파스텔 톤 가구와 화려하고 귀여운 장식품이 그런 감상을 끌어냈으나 이는 어디까지 배경일 뿐.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전혀 다른 세상이라는 인식을 주는 가장 큰 요소는 다름 아닌, 사람 키만 한 봉제인형이다.

 만지면 부드럽고 잡아보면 말랑한 것이 시중에 파는 여느 인형과 다를 바 없는데 6피트 남짓한 것들이 전부 알아서 움직였다. 주문을 받아 서빙하고, 도구를 쥐고 청소하는 인형들은 말을 못할 뿐, 말랑한 사람 같았다.

 점장은 인형에 대한 얘기를 일체 하지 않았다. 카페를 홍보할 적 팸플릿에서는 웨인 테크에서 협찬을 받았다는 한 줄 이외엔 어떠한 설명도 없었다.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기자들이 웨인사에서 무기를 개발한다느니, 안드로이드를 시험 운영 중이라느니 추측이 난무하는 기사를 어지럽게 쏟아냈지만 그마저도 얼마 가지 않았다. 메르헨을 찾는 사람 대부분은 인형이 어떻게 움직이든지 별 관심 없었기 때문이다.

 메르헨 카페는 오픈 이후 사람이 늘었으면 늘었지, 줄어들지 않았다. 카페라는 본분을 잊지 않은 은은한 커피 향과 달달한 디저트는 흥미로 방문한 손님을 전부 단골로 바꿀 정도로 일품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사실 유명세에 불을 지핀 건 스스로 움직이는 인형도, 몽환적인 인테리어도, 맛도 모양도 일품인 디저트도 아닌 카페를 총괄하는 점장이었다. 일류 화가가 그려낸 듯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자수정 닮은 맑은 눈동자,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 거기에 동화 속 등장인물이 입을 법한 의상까지. 점장은 카페의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보다 봉제인형을 데리고 고담을 지배하러 온 비스크 인형이라는 네티즌의 글이 더 신빙성 있을 만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인간이 아니긴 하지.”

 

 제이슨은 온갖 찬양과 주접이 난무하는 검색 결과를 둘러보다 핸드폰을 꺼버렸다. 카페를 열겠다기에 무슨 꿍꿍이인가 싶었는데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낌새는 전혀 없는 듯하다. 한 번 다녀온 티모시도 말했다, 의외로 성실히 일한다고. 마법은 인테리어를 꾸미고 인형을 움직이게 만드는 데만 사용했지 판매되는 커피와 디저트류는 전부 직접 만들었단다.

 사람이 갑자기 변할 수 있나? 아니, 원래 이런 사람일지도. 연기하는 걸 수도 있고. 마릴린은 처음부터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었다. 티모시는 애정하는 대상이 바뀌었으니 그에 맞춰 달라졌다 말했으나 브루스는 더욱 의심을 키웠다. 알프레드는 마법사의 관심이 레드후드를 향해서 걱정하는 거라고 했다…….

 그 양반이 그럴 리가 있나. 제이슨은 입술을 비죽이며 무채색 공간에 홀로 알록달록한 건물을 응시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내부는 점심시간이 한참 먼 오전임에도 사람이 많았다. 5, 6피트 남짓한 인형들이 분주히 돌아다녔고 한 놈은 손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저건 왜 저기 앉아 있어? 제이슨은 뚱한 표정을 내버려 두고 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세요!”

 

 유리문을 당기자 청량한 종소리와 함께 카페 특유의 씁쓸한 향이 훅 끼쳐왔다. 동시에 카운터에 서 있던 점장이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인사를 건넸다. 제이슨은 매번 보던 표정과 전혀 다른 분위기에 괴리감을 느꼈다. 처음 본다면 대부분 넋을 잃을 아름다운 미소였으나 그에겐 그렇지 못했다.

 마법사는 레드후드가 패트롤을 도는 시간과 장소를 어떻게 아는지, 조금 여유롭다 싶을 때마다 어딘가에서 튀어나와서는 묻지도 않은 일과를 나불거렸다. 그가 맞장구를 치든 안 치든 아이 같은 함박웃음을 머금었는데 지금 그의 표정은 예의상 짓는 형식적인 미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어디서든 헤프게 웃는 줄 알았더니 의외로 사람을 가리나보다.

 

 “주문하시겠어요?”

 

 평범하게 카페에서 일하는 민간인처럼 보이는 게 어지간히 충격이었는지 제이슨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민 중이었다는 듯 능숙하게 주문하고는 카드를 내밀었다. 꽤 자연스러운 대처였다. 마릴린은 짧지 않은 공백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다.

 제이슨은 답지 않은 실수를 한 자신을 속으로 비웃으며 괜히 내부를 슥 둘러봤다. 눈여겨 보아도 볼 거라곤 아까부터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인형 말곤 없어서 시선은 금방 제자리를 찾았다. 녹음에 잠식된 푸른 눈은 저도 모르게 사뿐사뿐 움직이는 마법사를 응시했다.

 사람들은 그를 살아 움직이는 비스크 인형이라 말하지만 제이슨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굳이 비교하자면 오전보다는 밤이 더 그렇지. 마릴린은 인공적인 조명이나 햇빛이 아닌 은은한 달빛이 더 잘 어울렸다. 영업용 미소는 또 어떻고. 장인이 빚은 조각상처럼 흠잡을 곳 없는 표정은, 달 아래서 수줍게 그린 웃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걸 단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겠지.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마릴린을 모른다.

 

 “손님?”

 

 ―모르는 게 당연하지. 마릴린은 그런 모습을 오로지 그에게만 보여주었으니까! 제이슨은 상념에서 벗어나 내민 커피를 낚아채듯 받아들고 서둘러 카페를 벗어났다. 조용히 흘러나온 외로운 인사는 경쾌하게 흔들리는 종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이목구비를 뜯어보다 넋이 나간 꼴이 얼마나 멍청해 보였을지 가늠도 안 된다. 몇 번 불렀을까, 세 번? 네 번? 순간적으로 본 의아한 표정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제이슨은 머리로 열이 몰리는 걸 느끼며 남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격한 흔들림에 넘친 커피가 손가락을 차갑게 식혔다.

 

 

 

 오후까지 정신을 붕 뜨게 만든 민망함은 몇몇 빌런에게 바람구멍 몇 개 뚫어주는 것으로 털어냈다. 일어나지도 못하는 좀비 같은 행색의 사람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졌고 주변에 짙은 혈향이 그득하게 깔렸다. 죽이지는 않았지만 좋지 않은 곳을 스쳐서 저승과 안녕하기 직전인 놈들이 몇 명 있다. 그러게 누가 급소를 대주래? 죽일 생각은 없었던 레드후드는 떳떳했다.

 상황이 마무리 되었으니 뒷정리는 GCPD에게 맡기고 이만 떠나야 한다. 영감과 마주치면 한 소리 들으니까. 결과적으로 죽진 않았어도 생사를 신경 쓰지 않고 쏴갈긴 건 맞으니, 분명 그 점을 꼬집으며 설교를 늘어놓겠지. 레드후드는 헬멧 아래로 입술을 비틀며 걸음을 옮겼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 달링!”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사각에서 마릴린이 나타났다. 이렇게 나타나는 데 익숙해졌고 오늘도 뿅 튀어나올 걸 예상해서 놀라지는 않았다. 레드후드는 열기가 식지 않은 총을 여전히 양손에 쥔 채 사뿐사뿐 다가오는 이를 응시했다.

 

 “이번엔 그거냐.”

 “역시 스위티가 나은가요?”

 “아니.”

 

 걸음에 맞춰 좌우로 살랑이는 머리카락이 언뜻 꼬리처럼 보인다. 헤픈 미소를 그린 채 행복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 사람을 좋아하는 대형견과 닮았다.

 

 “이상하게 부르지 마.”

 “이상한 게 아니라 애칭이에요.”

 “애칭으로 부르지 말라고.”

 “그렇지만 레드후드는 어감이 너무 딱딱한 걸요.”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을 걸 안다. 그의 말은 전부 들어줄 것처럼 굴면서 이상한 쪽으로는 고집을 부린다. 레드후드는 일곱 번이 넘어간 후로 세지 않은 여전한 대화를 한 귀로 흘려들었다. 여러 가지 애칭을 늘어놓던 마릴린은 그가 거절만 하자 뚱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럼 이름을 알려줘요.”

 “말했잖아.”

 “가명이었죠! 난 본명이 알고 싶다구요.”

 “가명인 건 어떻게 알았어?”

 “달링이랑 안 어울렸거든요.”

 “…허, 참.”

 

 레드후드는 총을 홀스터에 집어넣고 몸을 돌렸다. 마릴린은 그 뒤를 당연하다는 듯이 따랐다. 레드후드가 제 말을 무시하듯 행동했음에도 화난 기색은 없어 보인다. 오히려 멈췄던 주인이 드디어 움직여서 신난 강아지 같기도 했다.

 보폭이 좁은 마릴린은 키가 큰 레드후드를 따라가려면 빨리 걷거나 가볍게 뛰어야 했다. 레드후드는 맑은 목소리를 배경음 삼아 성큼성큼 걷다가 제 뒤를 따르는 이의 호흡이 거칠어지자 은근슬쩍 걸음을 늦췄다.

 물론 레드후드의 손짓 하나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마릴린은 서툰 배려를 알아차렸다. 자신을 신경 써준 사실이 뛸 듯이 기뻤으나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그가 의외로 부끄러움을 많이 타고 솔직하지 못한 성정임을 일찍이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 대신 며칠 전부터 열심히 초대 중인 메르헨을 화제로 꺼냈다.

 

 “언제쯤 내 카페에 와줄 거예요? 달링이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이것저것 내놓는 중이에요. 한 번 쯤 와서 먹어줬으면 좋겠어요!”

 

 마릴린은 레드후드가 오늘 오전에 방문했다는 걸 모른다. 그의 이름은 고사하고 맨얼굴도 모르기에. 손가락만 한 번 튕기면 그는 물론 모든 자경단의 본체를 알아낼 수 있으면서 마릴린은 그러지 않았다.

 시크릿 아이덴티티는 자경단에겐 대단히 민감한 사항이다. 배트맨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알아내고 퍼트릴 수 있는 마법사를 경계했지만 레드후드는 괜한 걱정이라 여겼다. 마릴린은 애정하는 사람에게 미움 받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그런데 멋대로 선을 넘을 리가.

 상대는 생각 않고 제 감정만 우선시한 빌런들이 어떤 짓을 벌였던가. 그에 반해 마릴린은? 그는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 애쓰는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처럼 굴었고 그러기 위해 기꺼이 권능을 내려놓았다. 마릴린은 레드후드가 스스로 알려주기를 바랐다. 배트맨에게 고위험군이라 낙인찍힌 마법사는 사랑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했다.

 

 “…갔어.”

 “네?”

 

 레드후드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바이러스이자 무력감 속에서 죽게 만든 원인이었다. 레드후드는 사랑을 증오했다.

 

 “카페에 가봤다고.”

 

 그러나 온전히 거절하지는 못 했다. 남김없이 퍼줄 것처럼 쏟아붓는 애정은 특히나.

 레드후드는 제 말을 듣고 은하수를 담은 듯 반짝반짝 빛나는 보라색 눈을 마주하면서 후회와 고양감, 기쁨과 불안… 위아래가 뒤집히는 양감의 감정을 느꼈다. 시선을 마주한 것만으로 대가 없이 들이밀어지는 애정이 부담스러워 질식할 것 같았다.

 

 “어, 언제, 언제요? 언제 오셨어요!”

 “…오늘.”

 “헉!”

 

 두 사람은 걸음을 멈췄다. 놀라 굳은 마릴린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우뚝 멈춰 서자 레드후드도 따라서 멈춘 것이다. 헬멧을 뚫을 듯 꽂히는 시선이 매섭다. 이제 마릴린의 눈동자는 반짝임을 넘어서 네온전구 마냥 홀로 번쩍거렸다. 곧 있으면 레이저도 쏠 기세다.

 레드후드는 절로 돌아가려는 고개를 붙잡았다. 헬멧을 쓰고 있어 다행이었다, 눈을 굴리는 건 안 보이니까. 보랏빛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는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오늘 무지 멋지고 잘생긴 손님이 오셨는데 그게 달링이었을까요?”

 “글쎄.”

 “달링을 못 알아보다니! 다음에도 오면 그땐 꼭 아는 체 할게요. 그러니 한 번 더 와주면 안 될까요?”

 “…생각해보고.”

 

 다른 때였으면 칼같이 거절했을 제안에 여지를 남긴 건 오늘 하루가 그의 심경에 변화를 주었기 때문일까. 책임감 없는 애매한 대답인데도 마릴린은 뛸 듯이 기뻐했다. 발을 동동 구르며 하고픈 말이 있는 듯 입을 달싹이다가 꾹 다물었다. 골목에 갑작스러운 정적이 내려앉았고,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달링을 생각해서 계획한 테마가 있어요! 다음 달에 바꿀 생각이었는데 당장 준비할게요. 달링이 언제 올지 모르니까요! 걱정 말고 내일 와도 돼요. 달링이 와준다면 새벽에도 오픈할 수 있고 밤늦게 마감할 수 있어요! 그러니 언제든 다시 와줘요. 알았죠? 난 지금 당장 다시 카페로 가서 정리 해야겠어요. 오늘 함께 돌아가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강한 히어로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죠? 그럼 좋은 밤 보내요, 달링! 조심히 돌아가요. 무슨 일이 생기면 내 이름을 크게 불러줘요! 언제든 달려갈 테니까!”

 

 말을 멈춘 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는 듯 빠르게 다다다 쏟아낸다. 그리고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손가락을 튕겨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가로등 하나 없어 원래 깜깜했던 골목에 달빛을 반사하는 은발과 홀로 반짝이던 눈동자가 사라졌다고 더 어두워졌다는 착각이 든다.

 세이프 하우스 근처에서 축객령을 내릴 때까지 졸졸 따라오던 마릴린이 처음으로 먼저 떠났다. 레드후드는 존재했던 증거인 양 남아 사라지기 직전인 보라색 증기를 손으로 흩트리고는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몇 분 전과 달리, 골목에서 들리는 발소리는 하나였다. 제이슨은 정적이 들어찬 골목을 누비며 괜스레 미간을 구겼다.

 

 

 

 제이슨은 바로 다음 날 메르헨 카페를 찾았다. 딱히 노린 건 아니고, 근처에 온 김에 마릴린이 준비한 걸 보려고 겸사겸사. 오늘은 멀리 돌아야 해서 애용하는 바이크도 끌고 왔다. 카페를 들리면 시간이 빠듯해서 가져온 건 아니다. 제이슨은 마릴린이 다른 사람을 보고 제게 쓰던 애칭으로 부르는 걸 떠올리며 갈등했던 오전을 모른 척 했다.

 메르헨 카페는 어제와 전혀 달랐다. 아기자기한 파스텔 톤은 어디 가고 정열적인 빨강이 내부를 채웠다. 메인 컬러는 크림슨. 보조 색은 화이트와 블랙. 붉은색을 과하게 쓰면 다소 부담스러운데 보조 색의 적절한 조화 덕에 오히려 세련미가 부각됐다. 어제의 메르헨이 모자 장수의 티파티 같았다면 오늘의 메르헨은 하트 여왕의 티타임 같았다.

 유리창에는 테마에 맞춰 딸기 디저트가 새로 나왔다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테마는 빨간 모자Red riding hood. 대놓고 겨냥한 듯한 콘셉트. 제이슨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문을 열었다.

 직장인이 막 퇴근한 저녁 시간이니 만큼 좌석은 손님으로 꽉 차 있었다. 내부를 슥 둘러본 제이슨은 어제와 같은 자리를 떡 하니 차지한 인형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저건 왜 저기 앉아있냐고. 카페를 운영하는 마릴린 마음이겠지만 한창 손님이 많은 시간에 한 가운데 테이블을 차지한 건 아무래도 신경 쓰였다.

 뭐, 인형에게도 쉬는 시간이 필요한가 보지. 저기는 인형 전용 좌석이고. 제이슨은 주문을 마친 앞사람이 비켜서자 지갑을 꺼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릴린과 눈이 마주쳤다. 

 

 “주문―….”

 

 예의 영업용 미소를 띠고 형식적인 멘트를 하던 이가 배터리 다 된 기계처럼 우뚝 멈췄다. 보라색 유리구슬이 이채를 띠며 반짝반짝 빛나고 가늘던 눈매는 천천히 크기를 키웠다.

 

 “달링…?”

 

 놀람에서 경악, 기쁨, 행복으로 넘어가는 감정 변화를 실시간으로 관람한 제이슨은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하얀 동공이 하트로 변할 만큼 애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시선을 헬멧 없이 마주하기에 그는 따뜻하고 간지러운 분위기에 면역이 없었다.

 

 “달링! 와줬군요!”

 

 볼을 발갛게 물들인 마릴린이 억눌린 비명을 질렀다. 제 딴에는 최대한 소리를 줄였겠지만 잔잔한 음악이 깔린 카페에서는 충분히 컸다. 이 바람에 카운터로 시선이 몰리는 건 당연했다. 제이슨은 절로 움직이려는 다리를 가까스로 저지하고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이런 식의 주목은 반갑지 않다.

 능숙하게 손님을 응대하던 점장은 어디 가고 좋아하는 사람을 눈앞에 둔 하이틴의 여주인공만 남았다. 마릴린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어쩔 줄 모르다가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손끝에 보랏빛 증기가 일렁이는가 싶더니 두 사람에게 쏟아졌던 시선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무슨 마법을 쓴 건지는 몰라도 제이슨은 겨우 숨이 트였다.

 마릴린은 어느 새 카운터 바깥에 있었다. 제이슨이 낯선 분위기에서 벗어나 막 정신을 차렸을 즈음, 그의 손을 붙잡고 카페 중앙으로 향했다. 공간을 나누듯 카페 한가운데를 가로지른 낮은 칸막이와 그 중앙에 위치한 테이블. 어제오늘 봉제인형이 차지했던 자리였다.

 

 “짠~ 여기가 달링의 자리예요. 카페가 잘 보이고, 내가 잘 보이고, 나도 달링이 잘 보이는 명당이죠! 앉아서 기다려줄래요? 아직 일이 조금 남아서요, 얼른 처리하고 올 테니까… 앗, 혹시 바로 가야 하나요?”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기색으로 횡설수설 말하던 이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멈칫거리며 물었다. 안 그래도 봉제인형이 테이블 하나를 통째로 지켰던 이유가 자신임을 깨닫고 머릿속이 복잡해진 제이슨은 시야 가득 보랏빛이 가득 차자 숨을 멈췄다. 코끝을 맴돌던 은은한 단내가 훅 끼쳐들었다.

 

 “……아니.”

 “다행이다! 5분만 기다려줘요. 금방 올게요! 그동안 폭시랑 놀고 있어요!”

 

 하마터면 혀를 씹을 뻔했다. 터지려던 호흡을 잘게 기침하며 겨우 삼킨 그는 대답 대신 고개만 살짝 주억였다. 비 맞은 고양이처럼 울망이던 표정이 삽시간에 풀어졌다. 마릴린은 눈에 띄게 안도하며 제이슨을 의자에 앉혔다.

 마릴린은 이따금 예고도 없이 거리를 좁혀 퍼스널 스페이스를 침범하곤 했다. 그럴 때면 유연하게 피하거나 막아냈는데, 이번 만큼은 브레이크 없이 돌진하니 놀랄 수밖에. 제이슨은 빠르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주시하다가 깊은 한숨을 쉬며 턱을 괴었다.

 오늘 제이슨의 자리를 지켜준 인형은 주둥이가 둥글게 튀어나온 늑대 인형이었다. 마릴린은 이것을 폭시라고 불렀다.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줬나. 폭시는 테마에 맞춘 할머니 복장을 하고 있었다. 잘 어울리네. 제이슨은 저와 앉은키가 같은 거대한 인형을 살피다가 자세를 편히 고치며 중얼거렸다.

 

 “이 자리는 내가 올 때까지 지킨 거였냐.”

 

 그러자 폭시의 고개가 위아래로 두어 번 움직였다. 마릴린이 말한 대로 인형과 놀 생각은 없었고 얼떨떨한 기분을 털어내기 위해 혼잣말을 한 거였다. 봉제인형이 소음에 섞여 듣기 어려웠을 말을 제대로 듣고 대답을 해줬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잠시, 제이슨은 폭시의 수긍이 무엇을 뜻하는 지 깨닫고 목 위가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는 마른세수를 하듯 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고개만 들면 앞에 카운터가 있다. 시야를 가리는 것 하나 없이, 마릴린이 아주 잘 보인다. 메르헨 카페 점장은 이번엔 동화 속 빨간 모자처럼 붉은색 케이프를 둘렀다. 테마에 충실한 의상을 오늘도 가뿐히 소화해냈다. 빨간색이 저렇게 잘 어울릴 일인가. 생각해보면 어린이 연극에서나 볼 법한 독특한 의상이 그에게 어울리지 않은 적 없었다. 괜히 인터넷에서 마릴린을 살아 움직이는 비스크 인형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카운터를 멍하니 바라보던 제이슨은 힐끔 저를 바라보는 이와 눈이 맞았다. 그 순간, 멀리서도 눈에 띌 만큼 마릴린의 몸이 파드득 떨렸다. 그에게 귀와 꼬리가 있었다면 당장 털을 부풀린 채 위로 한껏 치솟았을 것이다. 그는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이곤 태연하게 다음 주문을 받았지만 드러난 귀 끝이 케이프와 같은 색으로 물든 건 숨기지 못했다.

 시선 하나 마주친 거 가지고 저런 반응이라니. 제이슨은 덩달아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고개를 홱 돌렸다. 겨우 가라앉혔던 심장이 다시금 요동친다. 여전히 간질간질한 분위기가 어색해서 애꿎은 손끝만 잡아 뜯었다.

 그가 막 평정을 되찾을 즈음, 마릴린이 돌아왔다. 폭시는 제 할 일은 끝났다는 듯 벌떡 일어났고, 그 자리를 마릴린이 차지했다. 그는 함께 들고 온 트레이를 제이슨 앞으로 밀어주었다.

 

 “달링의 취향을 몰라서 무난한 거로 가져왔어요. 커다란 하트는 내 마음이고, 레드벨벳 케이크는 지금 가장 잘 나가는 메뉴예요!”

 

 제이슨은 저를 향해 장난스레 눈 한 쪽을 찡긋거리는 걸 모른 척하며 트레이를 보았다. 동그랗고 넓적한 컵에 담긴 연갈색 위로 새하얀 하트가 크게 떠 있다. 붉은 시트와 생크림, 딸기가 조화를 이룬 레드벨벳 케이크는 인기가 많은 이유를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외양부터 먹음직스럽다. 이 모든 게 그를 생각하며 만들었다는 티가 난다. 제이슨은 포크로 케이크 한 구석을 잘라내며 넌지시 말했다.

 

 “용케도 알아봤네.”

 “어제 그렇게 힌트를 줬는데 몰라보면 안 되죠!”

 

 마릴린은 매우 행복해 보였다.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해사한 미소를 짓는 것이 꿈을 꾸는 아이 같다. 제이슨은 낯선 감정에 속이 불편해서 얼른 잘라놓은 케이크를 입으로 가져갔다. 폭신한 시트와 달곰한 생크림, 차가운 딸기가 부드럽게 씹혔다. 확실히 맛은 있었으나 그의 입에는 너무 달았다.

 

 “어때요?”

 

 여상히 묻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두 손은 어느 새 가볍게 맞잡은 채다. 제이슨은 엷은 김이 올라오는 컵을 들었다. 컵 위에 있던 완벽한 하트가 조금 찌그러졌다. 커피의 쓴맛이 케이크의 단맛을 어느 정도 중화해주었다. 그런데도 혀에 짙게 눌어붙은 단맛에 제이슨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괜찮네.”

 “정말요?”

 “나한텐 좀 달긴 한데 나쁘지 않아.”

 

 괜히 투덜거리는 대신 솔직하게 감상을 말하자 긴장으로 굳었던 표정이 삽시간에 녹아내렸다. 마릴린은 배시시 웃으며 달아오른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달링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되어 너무너무 기뻐요!”

 

 그러니까 입맛 하나 알게 된 거 가지고 왜 저렇게 반응하는 거냐고. 되새겨 보면 마릴린은 그의 말 하나 행동 하나에도 큰 영향을 받았다. 제이슨은 그에게 전염된 듯 얼굴에 열이 몰리려는 걸 오늘 저녁에 해야 할 일을 되새기는 것으로 가라앉혔다. 저에게 스스럼없이 쏟아지는 애정을 맨얼굴로 마주하자니 헬멧을 썼을 때보다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제이슨은 몇 분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부터 시작해야 하는 일이 있어 시간을 더 지체해서는 안 됐다. 이는 표면적인 이유고, 사실은 이것저것 질문하며 저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앞사람이 부담스러운 게 컸다. 아직 케이크가 반 이상 남아있었지만 제이슨도 마릴린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벌써 갈 시간인가요? 입에 맞는 메뉴를 준비해놓을 테니 다음에도 와줘요!”

 

 마릴린은 대놓고 아쉬워 하면서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항상 그랬다. 지겹도록 뒤를 쫓아오다가 진심으로 거부하면 더 다가오지 않았다. 그럴 때면 물끄러미 뒷모습만 바라보았지.

 제이슨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손만 살랑살랑 흔드는 이를 보다가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제이슨 토드.”

 “네?”

 “내 이름.”

 

 맨얼굴에 이어 본명까지 알려준 건 본 모습으로 달달구리한 호칭을 듣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따라붙었다. 그를 아는 이가 알았다면 기함을 토했을 테지만 제이슨은 떳떳했다. 마릴린이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 일을 벌이지 않을 거라는 묘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손으로 입을 가린 마릴린은 눈이 그렁그렁했다. 제이슨은 그가 무어라 덧붙이기 전에 얼른 몸을 돌렸다. 본명을 알려준 건 후회하지 않지만 아직은 우는 이를 달래는 재능이 없었다, 제가 좋아서 그러는 거라면 더더욱.

 제이슨은 괜히 귀를 만지작거리며 바이크에 올라탔다. 어쩐지, 오늘 패트롤 이후에 마릴린을 만날 시간이 조금 기다려지는 것 같았다.

 

 

 

 

 

 

 

 

 


공미포 8347자

 

제이슨 토드 = 레드후드

마법사 = 마릴린 = 마리

3인칭 할 때 마리라고 해야 하는데 마릴린이라고 한 건 제이슨이 마릴린 이름으로도 안 불러줘서...

제이슨이었다가 레드후드였다가 왔다갔다 한 건 일반인 제이슨 토드와 자경단 레드후드를 분리하려고.

시점이 1인칭이라면 모를까 3인칭으로 쓰니까 때에 따라 바꾸게 되는 듯

 

좀 더 달달하고 녹아내리는 로맨스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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