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자기 스위트룸
카테고리
작성일
2022. 2. 10. 22:13
작성자
순묵애빛

※ 원작 캐릭터와 자작 캐릭터가 엮이는 드림

드림에 거부감이 있으시면 뒤로 가기 해주세요

 

 

 

+) 타 사이트에 개시했던 걸 옮김



 

 

 

 

 

 

 

 

 

 

 

1. 조우





 레드후드는 최근 고담에 들어와 빠른 속도로 영역을 넓히는 갱단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날은 그들이 무기를 밀수입했다는 정보를 얻어 항구로 향한 날이었다. 밀수입한 물건의 위험성에 비해 주변이 조용하다고 생각할 즈음, 그는 컨테이너 위에서 춤을 추는 인영을 발견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나부끼는 은색 머리카락이었다.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형상이 어찌나 비현실적이던지, 레드후드는 자기도 모르는 새 약에 당했는지 잠시 되짚어야 했다.

 아무리 떠올려도 자신에겐 어떤 이상도 없음을 확신한 다음으로는 갱단의 리더라는 미다스가 상당히 멍청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정보를 빼 올 때 간단한 해킹만으로 해결한 데에 의심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미다스가 소문이 무성할 정도로 머리가 나쁘다면 어느 정도 납득할 만했다.

 그런데 이 정도로 등신일 줄은 몰랐지. 온갖 매력적인 무기가 가득한 커다란 짐을 고작 한 명에게 맡기다니. 레드후드는 헬멧 아래로 이죽이며 컨테이너로 다가갔다. 근처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저 위에서 춤을 추는 정신 나간 사람밖에 없음을 확인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 그는 저 인물이 메타휴먼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누가 알아? 저 나풀거리는 여자 한 명이 가차 없는 안티 히어로를 막을 능력이 있을지. 상대를 겉으로만 판단하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생각하는 건 오래도록 행한 자경단 생활의 습관이다. 레드후드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미리 총 하나를 뽑아 들었다.

 

 ”여기서 뭐하냐?”

 

 여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중력을 무시하듯 눈에 보일 정도로 가볍게 움직였다. 춤에 심취한 나머지 제 말을 못 들었거나 무시했으면 기꺼이 한 발을 낭비해줄 생각이 만연했던 그는 곧바로 움직임이 멈추자 상대의 반응에 집중했다.


 ”좋은 밤이에요, 레드후드!”

 ”날 아네.”

 

 단번에 알아보고 히어로 네임을 언급하는 데에 감탄한 게 아니라 그걸 알면서도 네가 태연할 수 있냐는 비꼼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상대는 자수정 닮은 눈을 부드럽게 휘며 화사한 미소를 그렸다.

 

 ”당연하죠, 그이가 고담에서 주의해야 할 사람을 전부 알려주었거든요. 그런데 어쩐 일인가요? 나는 당장 있을 약속 때문에 아주 바쁘답니다.”

 ”무슨 약속?”

 ”사이먼이 일을 제대로 끝낸다면 같이 춤을 춰주겠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연습 중이었죠. 제대로 춰본 게 꽤 오래전이라 조금 긴장되네요.”

 묻는 대로 착실히 답해주는 것도 모자라 알 필요 없는 사정까지 재잘거린다.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 마냥 쉴 새 없이 나불거린다. 레드후드는 황당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머리 나쁜 놈 옆에 정신 나간 녀석이 있군. 그리 단정한 레드후드가 멋대로 떠드는 이의 말허리를 자르려는 순간, 단조로운 벨 소리가 울렸다.

 출처는 컨테이너 위였다. 움직임을 멈춘 채 품을 뒤적이던 여성은 핸드폰이 서툰지 작고 네모난 기기를 이리저리 만지다가 겨우겨우 전화를 받았다.

 “앗, 사이먼!”

 그가 반갑게 외친 이름은 다름 아닌, 최근 들어 고담에서 이름을 날리는 갱단 우두머리의 본명이었다. 황당한 상황에 긴장이 느슨해졌던 레드후드의 눈초리가 다시금 날카로워졌다. 거리도 가깝고, 보안을 게을리하는 성정이니 저 사람의 핸드폰에도 별다른 장치는 없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해킹해서 통화 내용을 엿들을 기세였던 레드후드였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통화는 금방 끝났다. 중요한 대화를 하는 게 아니었나? 전화를 받는 이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었다. 지금 보니 나른히 풀려 헤프게 웃고 있기는 하지만.

 

 “누구야?”

 조금이라도 정보를 얻기 위해 부러 질문을 던졌다. 생각이 없는 건지 히어로를 만만하게 여기는 건지, 묻는 말에 꼬박꼬박 잘도 답해주던 여자는 이번에도 냉큼 답해주었다. 그러면서 쓸데없는 말도 덧붙였다.

 “내 사랑이요! 미안해요, 레드후드. 조금 더 대화하고 싶었는데 사이먼이 나를 찾네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봐요!”

 한껏 눈썹을 내려뜨리며 진심으로 죄스러운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미다스의 본명을 입에 올리며 활짝 핀 작약처럼 흐드러지게 웃었다. 행복에 젖은 얼굴로 제 할 말만 내뱉은 이는 마지막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아무래도 당장 오라는 연락이었나보다. 단순한 성향을 이용하여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두려던 레드후드는 입도 벙긋하기 전에 순식간에 사라진 인영에 멍하니 앞만 바라보았다.

 

 “…메타휴먼이었어?”

 

 그가 무대로 삼았던 컨테이너 역시 처음부터 이곳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그야말로 마법이라도 부린 것 같았다. 텅 빈 앞을 응시하며 허탈하게 웃은 레드후드는 미다스가 멍청하게 굴었던 이유를 납득했다. 이런 힘을 부리는 부하가 있다면 귀찮게 보안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그리고 며칠 뒤, 레드후드는 이상한 여자가 마법사라는 이명으로 활동하는 제 2의 할리퀸 같은 빌런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2. 목격





 먼저 단언하자면 레드후드는 이 일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간략히 말로만 전해 들은 상황이 어쩐지 애써 묻어둔 과거를 건드리기에 피했으면 피했지 직접 그곳으로 걸어 들어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 레드후드가 한창 추적 중인 자경단보다 먼저 현장을 맞닥뜨린 건 그저 우연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정말 우연이다. 상황이 겹치고 겹쳐 그리 보이지는 않지만. 선심 써서 연락하려던 레드후드는 과감히 관두었다. 이 사태에 끼지 않겠다고 단호히 선언한 본인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고했다간 그들 머릿속에 미묘한 시나리오가 펼쳐질 게 뻔하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사실은 막내를 걱정해 조용히 찾고 있었다.’는 내용으로. 사실을 설명해봤자 부끄러워 늘어놓는 변명으로 여겨질 테지. 배트맨은 말은 하지 않겠지만 가족의 정을 기반으로 두고 멋대로 해석할 게 뻔하다.

 심장을 간질이는 사사로운 감정은 반사적으로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헬멧 아래서 미간을 찌푸리며 입 안쪽 살을 짓씹던 레드후드는 조용히 총을 꺼내 들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로빈이 납치된 장소를 발견한 순간부터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마음에 안 드는 건 사실이라, 레드후드는 괜히 총을 불량하게 흔들면서 아래를 관망했다.

 로빈이 납치됐다. 눈 깜짝할 사이 세력을 키우고 얼마 전에는 조커와 거래까지 한 빌런, 미다스에게. 자세한 전말은 모르지만 그것이 굉장히 쉬웠으리라 레드후드는 단정했다. 초현실적인 힘을 부리는 마법사가 바로 옆에 있지 않나. 그는 미다스에게 제 애정이 얼마나 큰지 표현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분명 손가락 몇 번 튕기는 것만으로 1분도 되지 않아 로빈을 그 앞에 갖다 바쳤겠지.

 그날 밤을 기억한다. 달빛을 조명, 컨테이너를 무대 삼아 상기된 얼굴로 혼자 춤을 연습하던 마법사를. 제 능력이 없으면 보잘것없는 야심가가 뭐가 그리 좋다고 황홀경에 빠져 헤픈 얼굴로 사랑을 노래했는지. 그 꼴이 그가 가장 증오하는 빌런과 그의 혀 놀림에 말려들어 빌런이 된 이를 떠올리게 해 속이 들끓었다.

 뇌가 상념에 빠졌을 때 시각은 빠르게 내부를 훑어 정보를 얻었다. 이곳은 버려진 공장. 창문이라곤 천장 가까이 달린 미서기 창 몇 개. 출입구는 북서쪽에 단 하나. 그마저도 무장한 부하 둘이 지키고 서 있다. 아무리 밀폐된 공간이고 사람을 배치했다지만 그 로빈을 납치해놓고서 대단히 허술한 방비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건 미다스 옆을 떠나지 않는 마법사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시각이 차곡차곡 정보를 쌓는 동안 청각도 열심히 주워들었다. 미다스는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는데 상대는 배트맨이다. 생각 짧은 야심가가 거들먹거리며 떠벌려준 덕분에 쉽게 알아차렸다. 이 정도면 굳이 귀찮게 도청할 필요도 없겠군. 레드후드는 헬멧을 조작해 소리를 증폭 시켜 폐공장 내부에 울리는 소리를 더욱 키웠다.

 그리고 레드후드는 1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몇 번이나 주먹을 내려치려는 걸 참아야 했다. 미다스는 생각 이상으로 멍청해서 차라리 도청으로 배트맨의 목소리를 같이 듣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법사는 대체 저 새끼의 어떤 면을 보고 좋아하는 거지? 하긴, 이해 안 되는 건 할리 퀸도 마찬가지였다. 레드후드는 시끄럽게 꽥꽥 외치면서 성을 내는 남자를 달달한 표정으로 응시하는 이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배트맨, 뭔가 단단히 착각한 모양인데 애초에 이 거래의 갑은 나였어. 을이 갑에게 대들면 어떻게 되는지 제대로 알려주지.”



 입꼬리를 부들거리며 꼴사나운 미소를 짓던 미다스는 돌연 차분한 목소리로 기절한 로빈을 가리켰다.



 “죽여, 마릴린.”



 역시 이렇게 나오시는군. 미다스가 거래한답시고 내뱉는 내용은 도저히 거래라고 명명할 수 없는 순 억지였다. 전직이 사업가가 맞나? 그나마 납득할 만한 게 있다면 배트맨이 잘 구슬렸을 텐데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답이 없는 내용뿐이라 단호히 거절했을 것이다. 그 대가가 제 막내아들을 희생하는 것임에도.

 레드후드는 여전한 작태에 속이 뒤틀렸다. 당장 영감의 심정이 어떤지 궁금한데. 역시 도청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머릿속 한구석에선 얻은 정보를 빠르게 조합하며 몇 가지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었다.

 그는 상념을 관두고 로빈의 구출에 집중했다. 도수 높은 술을 빈속에 들이마신 듯 속이 쓰리고 혀끝에 아린 맛이 돌았다.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울분을 꾹 눌러 삼키고는 여러 시물레이션 중 그나마 나은 것을 실행하기 위해 발을 움직였다.



 “뭐해?”



 미다스의 말만 아니었더라면 당장 실행했을 것이다. 미다스는 살짝 당황한 얼굴로 마법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법사는 의자에 묶여 고개를 늘어뜨린 로빈 옆에 서 있었는데 이제껏 본 적 없는 표정을 지었다. 절망과 슬픔, 간절함이 뒤섞인 표정. 고담에 어울리지 않게 순수한 가치관을 가진 민간인들이 테러에 휘말렸을 때 저런 표정을 짓곤 했다. 빌런이 지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표정에 레드후드는 움직임도 사고도 잠시 멈춰두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죽이지 않기로 했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배트맨이 제 사이드킥을 쉽게 버릴 줄 누가 알았겠어?”



 마법사의 음성은 심히 떨리고 있었다. 레드후드는 마법사의 반응을 자세히 들여다보진 않았으나 저것이 연기가 아님을 알았다. 감이었다.

 미다스는 어느새 로빈을 지키듯 등지고 선 마법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법사는 완강했다. 아무리 적이라지만 상대가 다 자라지 못한 어린애임을 인지하고 그 사실을 고려하는 건 솔직히 의외였다. 대체로 좋아하는 이의 애정이 절실하면 아무리 비도덕적인 일이라도 그 사람이 원하는 걸 들어주기 마련이다. 민간인보다 윤리의식이 흐릿한 빌런은 특히나. 저 인간이 원한다면 간이고 쓸개고 내어줄 것 같던 메타휴먼은 상대가 어린애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 사랑을 막아섰다.

 미다스는 살살 꼬드김에도 넘어오지 않자 언제 상냥하게 굴었냐는 듯 돌변하여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마법사는 어깨를 떨고 말을 더듬으면서도 그의 말에 수긍하지 않았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한 남자가 길길이 날뛰며 품에 있던 총을 꺼내 들었으나 마법을 부리는 상대에겐 통하지 않았다. 망설임 없이 발포된 탄환은 로빈을 지키고 선 마법사 앞에 회전을 완전히 멈춘 채 그저 떠 있었다.



 “못 하겠으면 내가 하겠다는데 뭐 하는 거야?”

 “미, 미안해요, 사이먼…….”

 “사과는 됐고 당장 그 앞에서 비켜!! 아니면 네가 하든가.”

 “약속했잖아요, 로빈은 살려두기로! 해는 끼치지 않을 거고, 거래가 성사되면 무사히 돌려보낸다고―”

 “시발, 그놈의 약속 좀 깰 수도 있지!! 너 때문에 계획이 틀어지잖아!”

 “내가 도와줄 테니 다른 방법을 찾아봐요… 네?”



 난 사이먼의 마법사잖아요!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남자를 회유하려 들었다. 미움받을까 불안해하면서도 작은 아이를 포기하지 못하는 모습이라니. 지금만 보면 전혀 빌런처럼 보이진 않는다. 레드후드는 어쩐지 속이 불편해져 헬멧 아래 표정을 구겼다.

 아무튼 그의 목적은 로빈의 구출이었으니 슬슬 머릿속에 그려둔 계획 하나를 이행하려는 찰나 성큼성큼 걸어간 미다스가 마법사에게 손을 휘둘렀다. 살과 살이 마찰하는 커다란 소리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칫거린 레드후드는 손찌검 한 번에 나뭇가지 부러지듯 땅바닥에 쓰러진 이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마법을 썼다면 충분히 막거나 피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쓰지 못하는 건지, 필요한 조건이라도 있나 싶었으나 미다스가 로빈을 향해 발포할 때는 마법으로 잘 막아냈다. 그가 능력을 쓰는 건 몇 번 못 봤지만 그다지 제한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런데 왜 막지 않지? 무차별한 폭력은 신음을 참아가며 모조리 받아내면서 그 타깃이 로빈을 향하면 바로 마법을 썼다. 그것을 보며 능력의 조건이나 제한 등을 추리하던 레드후드는 일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입가가 느슨해졌다가 턱이 딱딱하게 굳었다.

 꼭 자신에게 모든 분노를 쏟아내길 바라는 것 같지 않나. 어린 히어로가 다치는 걸 막으면서 사랑하는 이의 기분을 풀어줄 방법으로 생각해낸 게 반항하지 않고 맞아주는 거라니. 레드후드는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던 헛웃음을 입술을 깨무는 것으로 겨우 삼켰다. 목구멍에 용암이라도 지나간 듯 속에서 열이 끓었다.

 구출 대상에 마법사도 포함해야 하나 고민할 즈음 미다스가 멈췄다. 화가 가라앉은 건지, 그 새 체력이 떨어졌는지. 그는 짓밟힌 꽃처럼 엉망진창이 된 마법사에게 씩씩거리다가 문을 지키던 부하 셋을 데리고 사라졌다. 이제 폐공장 내부엔 잔기침을 토해내는 마법사와 의자에 묶인 로빈, 위에서 관망하던 레드후드 세 사람만 남았다.

 바깥에서 들리던 소리가 완전히 멎자 레드후드는 내려가려고 했다.



 “너…….”



 그러나 나지막이 들리는 앳된 목소리가 그를 멈춰 세웠다. 깨어난 로빈은 제 발치에 쓰러진 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목소리가 평소와 다름없는 걸 보니 애초에 기절한 적 없는 사람 같았다.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풀어줄게요.”



 바닥에서 희미한 숨을 몰아쉬던 마법사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절뚝이는 걸음으로 로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예의 마법을 사용하여 간단히 속박을 풀어냈다. 허무할 정도로 쉽게 자유를 되찾은 로빈은 답지 않게 말을 고르듯 입을 달싹이다 겨우 말을 뱉었다. 앳된 음성이 잘게 진동했다.



 “넌…… 그 허접한 걸 왜 맞아주고만 있어? 내 공격을 막았던 것처럼 능력을 쓰면 됐잖아.”

 “난 괜찮아요.”



 그에 반해 마법사의 어조는 평이했다. 마치 자주 있었던 일인 양. 그는 아무렇지 않게 방긋 웃어 보이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허공에서 피어난 보랏빛 아우라는 여태 낡은 의자에 앉은 소년의 어깨에 앉아 간지럽히듯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초현실적인 현상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더듬듯 훑어가며 자잘한 생채기는 물론 코스튬에 묻은 먼지 하나까지 없애버린 뒤에야 자취를 감추었다.

 범위를 예측할 수 없는 힘을 부리는 건 알고 있었으나 치료까지 가능할 줄이야. 놀란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로빈은 이내 어린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불만을 토해냈다.



 “넌 치료 안 해?”

 “사이먼의 화가 다 풀리면 치료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 자식에게 돌아갈 거야?”

 ”당연하죠.”

 ”죽을지도 모르는데?”



 레드후드는 답지 않게 빌런의 사정을 신경 쓰는 로빈을 미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납치된 것도, 구해준 것도, 치료해준 것도 모두 같은 사람이라 판단력이 흐려졌나. 평소 같았으면 어쭙잖은 태도를 비웃었을 테지만 마법사가 소년을 대하는 걸 직관했더니 그럴 마음은 들지 않았다.



 ”데려다줄게요.”

 ”필요 없어.”

 ”출구는 하나뿐이고, 바깥엔 아직 그의 친구들이 있어요. 당신이 멀쩡히 두 발로 걸어 나가면 사이먼의 입장이 난처해져요.”

 ”그 녀석 입장 알 바 아니야.”

 ”게다가 나는 당신에게 무사히 돌려보내 주겠다는 약속도 했는 걸요?”



 두 사람의 공방은 로빈이 입을 꾹 다무는 것으로 쉽게 끝났다. 줄곧 무릎 꿇고 앉아 눈높이를 맞춘 마법사는 아이 마스크 아래로 미간을 좁힌 로빈에게 한 손을 내밀며 나지막이 물었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말해줄래요?”



 로빈은 못마땅해하다가 끝내 손을 잡았다. 아이가 적당한 장소를 말하자 마법사는 어지러울 수 있으니 눈을 감으라는 말 다음으로 3초를 셌다. 능력을 쓰는 데 그만한 시간이 걸리는 게 아니라 갑작스러운 이동으로 놀랄 소년을 배려한 것임을 레드후드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3초 후, 마법사는 손가락을 튕겼고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 폐공장 내부엔 안티히어로 한 사람만 남았다.

 레드후드는 두 사람이 있던 자리에서 일렁이던 보랏빛을 응시하다가 희미한 것이 허공에 흩어져 완전히 소멸하고서야 몸을 돌렸다.









 

3. 만남





 그때와 똑같다. 뒤로 묶인 손, 온몸이 으스러질 듯한 고통, 작은 소음을 내며 돌아가는 타이머, 밀폐된 공간. 떠오르는 악몽에 레드후드는 욕설을 짓씹으며 신음을 삼켰다. 그나마 다른 게 있다면 동반자가 있다는 것 정도. 레드후드는 근육에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비명을 지르는 몸을 움직여 제 옆에 쓰러진 이를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서 은은히 반짝이던 은발은 먼지와 피로 뒤엉켜 빛을 잃은 채 넝마처럼 시멘트 바닥에 흩어졌다. 타인이 듣기에도 귀가 녹을 만큼 달달한 밀어를 속삭이던 입술은 생기는커녕 피딱지가 덕지덕지 앉았다. 사랑을 위해 제 모든 것을 바쳤으나 바로 그 사람에게 버림받아 살아있는 폭탄 신세가 되다니, 그 할리 퀸이 공감 아닌 동정을 할 지경이다.

 미다스는 마법사를 버렸다. 로빈을 순순히 보내준 지 얼마 되지 않아 관계가 틀어졌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며칠 전부터는 행적이 묘연했다. 관계에 질려 고담을 아예 떠난 줄 알았는데 붙잡혀 있었나. 답지 않게 풍문을 무시하지 못해 패트롤 루트를 바꿔 홀로 조사하다 휘말린 레드후드는 핼멧 아래로 비뚤게 웃었다.

 

 “레드, 후드……?”

 

 흐릿한 시야를 내버려 둔 채 자조하던 레드후드는 돌연 앞에서 들려오는 가느다란 음성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죽은 듯이 누워 있던 마법사가 정신을 차린 것이다. 엿들은 말로는 마법을 쓰지 못하게 맹수용 마취제를 썼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렇게 빨리 깨어난다고? 메타 휴먼이라 몸의 구조가 다른 건가. 레드후드는 이번엔 소리 내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 왜… 여기에…?”

 “운이 나빴지. 너, 마법 쓸 수 있지? 이거 풀고 치료 좀 해줘. 나가게.”

 레드후드는 뻔뻔하게 요구했다. 아직 미다스에게 마음이 있다면 들어주지 않겠지만,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았나.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도 정말로 해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아서 대답도 듣지 않고 시선을 돌렸는데 앞에서 예상을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레드후드는 귀에 익은 소리와 동시에 손을 결박했던 존재가 사라짐을 느끼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설마 하며 옆을 보자 어느새 바짝 다가온 마법사가 그를 이곳저곳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기척 없이 다가옴에 놀라 어깨를 움칫거리자 마법사는 내밀었던 손을 빠르게 거두며 변명하듯 말했다.

 “다친 부위를 대강 알아야 해서… 좀 살펴도 될까요?”

 “…정말로 해주겠다고?”

 “네.”

 “왜?”

 “당신은 고담의 히어로잖아요?”

 

 여상히 말하는 표정은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당연한 말을 하는 양 태연했다. 레드후드는 방금 들은 게 정녕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기억을 되짚어야 했다. 그가 현실에서 멀어지든 말든, 옆으로 누운 이의 몸을 유심히 훑어보던 마법사는 이내 성치 않은 팔을 들어 손가락을 튕겼다.

 이 느낌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레드후드는 전신을 휘감는 기이한 감각에 욕설을 뱉었다. 어긋났던 어깨가 알아서 제자리를 찾고 부러졌던 갈비뼈는 제 잔해를 주워 스스로 조립했다. 여기저기서 아우성치던 근육들이 잠잠해졌고 욱신거리던 고통은 눈 녹듯 사라졌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느낌에 멍하니 누워있던 레드후드는 몇 초 지나지 않아 훨씬 좋아진 상태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윽.”

 “급한 부분만 치료한 거라 무리하면 안 돼요.”

 

 마법이라도 만능은 아니며, 자잘한 상처는 자연히 회복하는 게 낫다고 덧붙였다. 이 정도면 만능 아닌가? 치료에 순간이동에, 빌런이든 히어로든 구분 없이 탐낼 만한 능력이다. 이런 능력자를 그저 자기 기분을 거슬렀다고 쓰레기 버리듯 내치다니, 미다스 그 자식은 어디까지 멍청해지려는 건지. 레드후드는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저보다 상태가 심각함에도 잘만 움직이는 이를 바라보았다.

 

 “넌 치료 안 해?”

 “…난 괜찮아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마법사는 의외라는 표정이었다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레드후드가 말없이 쳐다보자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아서 말을 덧붙였다.

 

 “정말 괜찮아요. 이게 사이먼이 바라는 일이기도 하고.”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야?”

 “강한 마취제를 놓고 시한폭탄 옆에 둔 것만 봐도… 음, 이렇게 깨어날 줄은 나도 몰랐지만요. 아무튼 정말 괜찮아요.”

 이젠 괜찮아요. 그리 말하는 마법사의 얼굴은 모든 것을 털어낸 마냥 후련해 보였다. 그러나 평온한 낯에 어울리지 않게 바닥을 응시하는 눈동자는 체념이란 늪에 침잠되었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반짝 잘도 빛나던 것이 어둡게 가라앉아 초점을 잃은 것이 눈에 밟혀, 레드후드는 쉽사리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마법사는 그의 속도 모른 채 문을 가리키며 친절히 출구까지 알려주었다. 분명 굳게 잠겼어야 할 철문은 어느새 잠금쇠가 망가진 채 활짝 열려 있었다.

 “너는, 이대로 죽겠다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개량된 거라 위력이 상당할 테니 최대한 빠르게, 멀리 가세요.”

 

 마법사는 그의 물음을 의도적으로 회피했다. 그러나 그 말 또한 사실이라, 레드후드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야속하게 흐르는 것을 노려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인이 원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 고담을 위협하는 빌런 하나가 알아서 스러지겠다 했으니 아무리 그 배트맨이라도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빌런이라면 사정을 봐주지 않고 공평하게 머리에 바람구멍 하나씩 뚫어주던 레드후드였으니 그는 더 지체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문을 지나 복도 너머로 사라지던 발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성큼성큼 되돌아온 레드후드는 저를 놀란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마법사를 번쩍 안아 들었다.

 “뭐 하는 거예요?!”

 “가만히 있어, 달리기 힘들다.”

 

 레드후드는 그대로 내달렸다. 힐끗 확인한 폭탄의 타이머가 얼마 남지 않은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머릿속에서는 멍청한 짓이라느니 이럴 거였으면 뭣 하러 시간 낭비를 했냐니 자아가 엎치락뒤치락 싸웠지만, 몸은 착실하게 안아 든 이를 꽉 붙들고 다리를 움직였다.

 

 “놔줘요, 이러다 당신도 죽어요!”

 “나 혼자 갔어도 늦었어! 알면 좀 얌전히 있으라고!!”

 

 레드후드는 저를 놓고 가라는 이를 무시하며 그를 안은 팔을 고쳐들 뿐이다. 버둥거리던 마법사는 고집스럽게 치료하지 않은 상처의 통증 때문인지 얼마 못 가 힘을 빼고 축 늘어졌다. 저항하는 걸 붙잡느라 제 속도를 못 내고 불안하게 달리던 레드후드는 그제야 안정적인 자세로 달렸다.

 그가 막 더 속도를 내려는 참에 커다란 폭음이 복도를 울렸다. 등을 훑는 서늘한 느낌에 털이 쭈뼛 섰다. 건물이 울리며 부서지기 시작하는 잔해가 머리 위에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당장은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복도를 따라 빠르게 다가오는 불길이 더 심했지. 폭탄 하나가 터졌다고는 믿기 어려운 화력이었다. 레드후드가 허탈하게 웃으며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번져오는 불길을 쳐다보고 있을 때, 그의 품에서 익숙하고도 이질적인 소음이 들렸다.

 

 “왜… 그랬어요?”

 

 딱, 맞부딪치는 소리가 울렸을 때 거센 불길이 두 사람을 덮쳤다. 그러나 레드후드는 고통은커녕 열기마저 느낄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막이 그들을 보호해주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건물은 무너지고 불은 내부에 존재하는 산소를 잡아먹어 가며 모든 것을 불사르고 있었으나 마법사를 안아 든 레드후드는 무사했다. 1평도 되지 않는 좁은 공간만 동떨어진 듯 현실적이지 못해서 그는 굵은 눈물을 방울방울 쏟아내는 이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왜, 왜… 나를…….”

 “…난 히어로니까.”

 

 네가 그랬잖아. 평소였으면 본인 입으로 부정하며 헛소리라 치부했을 말을 내뱉은 건 반쯤 무의식이었다.

 

 “나, 는 빌런… 이에요.”

 “그게 꼭 죽어야 하는 이유는 아니잖아.”

 지금껏 친히 저승으로 보내준 이들은 물론 자경단이 들었다면 기함했을 것이다. 저를 잘 아는 이가 옆에 있었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을 레드후드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투명한 막이 그를 따라 움직여주었기에 두 사람은 여전히 불길에 휩싸이지 않고 이동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가뜩이나 모자란 말솜씨가 이제 와서 아쉽다. 가뜩이나 죽고 싶어 하는 빌런을 달래본 적도 없으니 그가 말을 고르는 시간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내려주는 순간 화염 속으로 뛰어들지도 모르는 이를 고쳐 안으며 생각에 잠겼던 레드후드는 긴 복도를 벗어나고서도 마땅한 문장이 떠오르지 않자 아예 입을 다물었다.

 

 “난… 할 만큼, 했어요.”

 침묵을 끊은 건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못한 마법사였다. 레드후드는 암울하게 중얼거리는 저의를 파악하지 못해 머리를 굴리다가 점점 땅을 파고 들어가는 혼잣말에 검열하지 않은 생각을 툭 내뱉었다.

 

 “살아.”


 말하고 나니 답지 않은 참견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말을 물리진 않았다. 주변을 둘러싼 불길을 따라 일렁이던 눈동자가 일순간 체념을 걷어내고 보랏빛 생기를 띠었다. 레드후드는 에둘러 말하는 것보다 직설적으로 말하는 게 낫다는 걸 깨닫고 입을 열었다.


 “그, 운명으로 이어진 사랑인지 뭔지… 살다 보면 만날 수 있겠지.”

 “50년 동안 찾아다녔는데도 못 찾았는데…….”

 “뭐? 너 몇 살… 아니, 이게 아니고……. 그래, 50년이나 투자했는데 이제 와서 포기하면 아깝잖아.”

 논리라곤 없는 부실한 말이었으나 하고픈 말은 전해졌다. 아리송했던 마법사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지고, 깊게 가라앉았던 눈이 반짝거리는 걸 보니 확실하다. 레드후드는 그제야 본인이 얼마나 낯뜨거운 소리를 지껄였는지 깨닫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귀 끝까지 붉어졌을 것이다, 아직 헬멧을 쓰고 있는 게 그나마 위안으로 다가왔다.

 “……그런 말 처음 들어요.”

 스승님도……. 조금 들뜬 어조로 혼잣말을 하던 마법사는 말끝을 흐리며 끝내 입을 다물었다. 또 무슨 안 좋은 기억이라도 꺼냈나 싶어 흘긋 바라보니 이제는 당당히 자기주장을 펼치는 보라색과 눈이 마주쳤다. 시체처럼 파리했던 안색이 나아진 건 좋지만 과하게 반짝거리는 시선이 부담스럽다. 레드후드는 아직도 산소를 잡아먹으며 꺼질 줄 모르는 불길에 주의를 돌리며 애써 무시했다.

 

 “근데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야?”

 “뭐가요?”

 “이러다 산소가 모자란 거 아니냐고.”

 “아… 그거라면 걱정 안 해도 돼요. 그렇지만 불안할 테니 나갈까요? 꽉 잡아요!”

 “뭐? 잠, 야!!”

 방금 전까지 삶에 희망이라곤 없는 것처럼 굴던 사람은 어디 가고, 마법사는 평소의 발랄함을 되찾았다. 양팔을 뻗어 레드후드의 목에 두르고 꽉 매달린 그는 히어로가 당황하든 말든 손가락을 튕겼다. 청명한 소리가 울린 직후, 레드후드는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장기가 붕 뜨는 감각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달라졌다.

 속이 메슥거렸고 머리가 울렸다. 발을 받치던 바닥이 사라졌다 다시 생겨나는 바람에 레드후드가 잠시 휘청였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마법사는 그의 품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언제 상처를 치료했는지 방금 전과 달리 비교적 멀쩡한 모습으로 저를 멍하니 응시하는 이들에게 손을 흔드는 여유도 부렸다.

 

 “마릴린?”

 “제― 레드후드!”

 

 두 사람은 그리 멀리 이동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있던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현재진행형으로 고막을 뚫어버릴 듯 울려대고 깨진 창문으로 불꽃이 치솟는 게 아주 잘 보이는 어느 건물의 옥상이었다.

 그 옥상에서 미다스와 그 갱단을 제압한 패트맨 패밀리를 마주쳤다. 막 달아나려고 했는지 아슬하게 걸쳐있는 헬기도 눈에 들어왔다. 레드후드는 여전히 속이 울렁거렸으나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 허리를 곧게 세웠다. 물론 숨기지 않아도 되는 헬멧 아래 표정은 잔뜩 찌푸린 채다.

 “좋은 밤이에요, 사이먼!”

 “마, 마릴린, 너… 어떻게.”

 

 미다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치사량의 마취제까지 주사했는데 멀쩡히 살아왔으니 겁이 날 수밖에.

 그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든 말든 시선을 맞춘 마법사는 야살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그에게 다가가는 여유도 부렸다. 그를 제압한 사람이 고담의 다크 나이트임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경고 차 다가오지 말라는 으름장을 듣고도 멈추지 않던 걸음은 배트랭이 미다스의 목덜미에 소리 없이 겨눠지고서야 멈췄다.

 “사이먼, 나랑 춤출래요?”

 “뭐?”

 그런데도 태도는 여전했다. 뜬금없는 말에 갱단과 자경단은 물론, 막 속을 다스린 레드후드도 넋이 반쯤 나간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다른 이들이 그러든지 말든지,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던 마법사는 다시 한번 말했다.

 “같이 춤춰주겠다고 했잖아요?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뭔 소리야… 그럴 정신 있으면 잘난 마법으로 나 좀 구해!!”

 미다스는 마법사가 자신을 해칠 생각이 없어 보이자 바로 태도를 바꿨다. 주제도 헤아리지 못한 채 윽박지르는 남자에 상황을 지켜보던 자경단은 하나같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를 위해 더러운 일이라도 팔 걷고 나선 절대적 아군을 헌신 버리듯 내칠 땐 언제고 뻔뻔하게 명령하는 꼴이란.

 누구보다 심기가 불편하면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배트맨은 엎어진 그를 제압한 무릎에 힘을 더 실었다. 조커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여 오래도록 트라우마로 남아 지금도 이따금 떠오르는 악몽을 재연해낸 것이 괘씸했다.

 미다스는 다크 나이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끙끙대면서도 계속 요구했다. 본인이 마법사에게 저지른 일은 없던 일인 양, 살아 돌아온 이에게 뭔갈 맞긴 사람처럼 당당하게 소리쳤다. 배트맨이 경고를 하고 듣다 못 한 레드후드가 욕설로 맞받아쳐도 그는 계속 입을 놀렸다. 처절하게 나불대던 입이 다물린 건 그가 마법사의 두 번째 제안을 거칠게 무시할 때였다.

 

 “그건 됐고, 나랑 춤출래요?”

 “미친 소리 좀 작작―!”

 “상황 파악이 안 돼요?”

 

 그에게서 나왔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냉랭한 음성이 울려 퍼지자 후덥지근한 바람이 냉기를 품고 날카롭게 불어와 그들의 피부를 쓸었다. 몇몇은 목덜미를 타고 올라오는 소름에 어깨를 떨기도 했다.

 마법사는 지금껏 보인 적 없는 무감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다스는 저를 차갑게 내려다보는 시선에 메두사와 눈이 마주친 사람이라도 된 듯싶었다.

 

 “나랑 춤출래요?”

 미다스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빚은 동상처럼 감정 없이 서 있던 마법사는 언제 표정을 굳혔냐는 듯 활짝 웃었다.

 

 “좋아요! 그럼 일어나요.”

 미다스는 말이 끝나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군더더기 없는 몸짓이 꼭 뭐에 홀린 사람 같다. 위를 짓누르던 배트맨이 주춤거리며 물러날 정도로 움직임이 거셌다. 세뇌가 아닌 단순한 조종인지 제멋대로 몸이 움직이는 미다스는 얼빠진 소리를 내며 마법사의 앞에 다다랐다.

 배트맨은 아직 마법사의 능력을 막을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러니 최소한 미다스를 데리고 도망치지 못하도록 가능성이 0.1%라도 있는 한 서로 접촉하지 못하게 갖은 방안을 세웠다. 그런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유일한 조건이라고 생각했던 핑거 스냅도 하지 않고 마법을 사용했다. 그 바람에 계획의 반 이상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히어로들은 두 손을 맞잡는 두 남녀를 보고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껏 그래왔듯 능력을 써서 순식간에 도망칠 줄 알았던 마법사는 미다스와 밀착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두 사람이 모습을 감추는 대신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잔잔한 음악이 조용히 깔렸다.

 미다스와 마법사는 춤을 췄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갱단이나 주변에 포진한 자경단만 없었다면 꽤 낭만적인 장면이었으리라.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돌연 마법사가 스텝을 끊고 손을 놓은 탓이다. 그걸로 모자라 멍하니 서 있던 미다스의 뺨을 세게 내려쳤다. 찰진 소리가 울려 퍼지자 바람처럼 들려오던 음악도 뚝 끊겼다.

 ”사이먼, 춤 정말 못 추네요.”

 ”뭔…….”

 ”우리 헤어져요!”

 미다스는 멍청한 얼굴로 서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든 말든, 남자를 바라보는 마법사의 눈에는 더 이상 애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평상시와 다른 태도에 미다스가 무어라 말을 하려 했으나 마법사가 고개를 저으며 검지를 제 입술이 갖다 대자 입만 벙긋거릴 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상황이 종료되었다. 마법사는 남자를 구하기는커녕 관심 한 자밤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것을 가장 먼저 파악한 배트맨이 다시 미다스를 구속했다. 마법사는 버둥거리는 옛 연인에게 다시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는 대신 긴장한 사람처럼 어쩔 줄 모르며 머뭇거리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 이질적인 소리가 어떤 파문을 일으키는지 알고 주의해온 자경단의 시선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마법사는 신경 쓰지 않는 건지, 모르는 건지 아랑곳 않고 어딘가에서 나타난 거울을 살피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마법을 사용하긴 했으나 아무래도 전신을 깨끗이 한 게 끝인 듯 싶었다.

 흙먼지 쌓인 창고에서 뒹굴다 온 사람 같았던 인물은 핑거 스냅 한 번으로 여느 모델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리저리 엉키고 본래의 색을 잃었던 머리카락은 미용실에서 관리를 받은 듯 윤기가 흘렀고 먼지와 피로 얼룩졌던 옷은 단정하고 깨끗한 복장으로 변했다.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겨 거울을 없앤 마법사는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이동한 뒤로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레드후드를 향해 사뿐사뿐 걸었다. 모두가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그릴 때 반짝이는 보라색과 시선을 마주친 레드후드는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레드후드. 아직 내 소개를 안 했죠?”

 

 명랑한 태도였으나 목소리가 잘게 떨리는 것을 자경단은 놓치지 않았다. 게다가 오직 한 사람만을 바라보며 살풋 머금은 수줍은 미소. 배트맨은 마법사에 대해 조사할 때 숫하게 봐온 익숙한 표정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이미 아실지도 모르지만 내 이름은 마릴린 밀러예요.”

 “뭔…….”

 “마리라고 불러도 돼요!”

 

 마법사는 레드후드에게 애칭을 허용했다. 애정하는 대상이 미다스에서 레드후드로 바뀐 것이다. 배트맨은 밀려오는 두통에 한숨이라도 내뱉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애써 침착하게 말을 고르던 레드로빈이 둘이 있을 때 무슨 짓을 했냐고 물었으나 레드후드는 답해줄 수 없었다. 폭탄이 터지기 직전까지 위로 같잖은 말만 했다. 그 서툴기 짝이 없는 말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였길래 이렇게 변하나. 레드후드는 제 앞으로 성큼 다가와 재잘거리기 시작하는 마법사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헬멧 위로 마른세수를 했다.

 

 “내가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스위티? 레디? 달링?”

 “이건 또 뭔 개소리야…….”

 

 벌써 조금, 마법사를 구하려고 했던 과거의 행적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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