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자기 스위트룸
카테고리
작성일
2016. 12. 29. 14:19
작성자
순묵애빛



캐릭터, 코가미 신야(사이코패스)

스타일, HL 연인드림 주종관계








※ 원작 캐릭터와 자작 캐릭터가 엮이는 드림 소설

※ 캐붕주의

합작 페이지


















 라미스. 최근 언론을 달구고 있는 인물. 이름과 행적 외에 알려진 것이 없는 라미스는 오늘도 신문 첫 장을 화려하게 차지했다. 서민층의 큰 지지를 받으며 혁명을 이끌어줄 사람이라는 헤드라인에 집중하고 있던 론은 동그랗게 뭉친 눈썹 한 쪽을 으쓱이며 신문을 내려놓았다.

 

 이만 주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흘 내내 다섯 시간도 안 주무셨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내밀어지는 찻잔을 받아 들고, 나긋하게 권해오는 코가미의 말에 살짝 끄덕였다.

 

 이것만 볼게요.”

 

 차를 홀짝이며 배시시 웃었다.

 정체를 철저히 숨겨가며 의적 아닌 의적 역할을 해오고 있는 아가씨의 유일한 하수인인 코가미는 그 날 이후로 눈에 띄게 무리하며 말을 아끼는 론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운 좋게 건진 목숨을 숨기기는커녕 아슬아슬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위험인물의 정보를 캐내려 하고, 목적과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집사인 자신의 손도 거의 빌리지 않고 저 혼자 모두 해내려는 모습이 답답하기도 했다. 코가미는 눈 밑에 짙은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는 아가씨를 주시하다가 자리를 옮겼다.

 론의 부모님은 살해당했고, 가문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지워졌다. 두 사람의 시체와 피 한 방울조차 깨끗하게 사라진 저택에서 론은 살아남았다. 부모님의 눈 밖에 나, 저택 끝 구석진 곳에서 지내고, 모두가 태어난 사실을 숨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론은 이런 일이 있었음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재산을 챙겨 저택을 떠나 존재를 감추는 걸 도와준 사람은 집사, 코가미였다. 그는 오래 전부터 아가씨의 집사였고, 두 귀족 부부의 딸이라는 사실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마음을 추스를 틈도 없이 도망치듯 저택을 떠난 론을 홀로 따라온 그는 언론을 장악해나가는 아가씨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묵묵히 지원하기만 했다.

 커튼이 크게 날릴 정도로 바람이 불어들었다. 싸늘한 바람이 방바닥을 훑으며 흩어졌다. 가까이 있던 코가미가 소리 나지 않게 창문을 닫았다. 버릇처럼 소파에서 꼼짝하지 않는 여인을 살핀 회색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곧 비가 내리려는지 어둑한 구름이 잔뜩 낀 하늘 아래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담던 코가미는 익숙한 얼굴이 보이자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커튼으로 창문을 가리며 입을 열었다.

 

 올 사람이 있습니까?”

 

 신문에 꽂혀있던 녹색 시선이 슬쩍 자리를 옮겼다가 되돌아갔다.

 

 올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좀 이르네요.”

 

 잘 시간은 없겠네. 론은 마지막 남은 차를 마시고 뻑뻑한 눈을 비볐다. 느린 움직임으로 신문을 반듯하게 접고 옆에 내려놓자마자 초인종이 울렸다.

 

 코가미 씨, 차를 좀 더 내올래요?”

 

 자신이 나가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한다. 코가미는 낯빛이 어두워졌다. 론이 대답도 듣지 않고 휙 가버리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찻주전자를 찾았다.

 코가미는 분명 론을 보조해주고 있지만 아는 것이 적다. 저택을 떠나올 때부터 론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코가미도 묻지 않았다. 집사 코가미 신야가 아가씨 론을 모시는 데에 이유가 있을까. 그가 그녀를 위해 해야 하는 건 확실하게 정해져 있었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론의 인사를 받은 남자는 못마땅한 듯 곁눈질하다가 안으로 발을 들였다.

 

 자네들은 여기서 기다리게.”

 

 같이 들어오려는 사람들을 밀어내고 문을 닫은 사람은 신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인물, 백작 폴란이었다. 그는 안내 받은 소파에 앉아 코가미가 건네는 찻잔을 받았다.

 

 자네가 라미스인 게 확실하겠지?”

 어제 확인시켜드리지 않았나요?”

 알아. 혹시나 해서 다시 물어본 거네. 그 작자가 이렇게 어린 사람일 줄은 몰랐어.”

 

 시시콜콜한 대화를 주고받으면서도 폴란은 동그랗게 모은 손가락을 잠시도 가만히 놔둘 줄 몰랐다.

 

 내가 의뢰하고 싶은 건…….”

 

 빠르게 말을 쏟아내던 입이 론 옆에 서있는 남자를 힐끗 보고서 꾹 다물렸다. 론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돌아보자 코가미는 고개를 저었다. 폴란은 머뭇거리다가 차 한 모금을 마시고 말을 이었다.

 

 자네는 항상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내가 무엇을 의뢰하려는지 알겠지?”

 물론입니다, 폴란 경. 찾기만 하면 되나요?”

 무슨 소린가. 위험의 싹은 잘라버려야 하네.”

 경께선 그 자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론의 말에 돌아오는 답은 확실한 부정. 그를 마주하던 론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달라진 분위기를 눈치 챈 백작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문제라도?”

 사람을 찾는 건 많이 어렵습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주겠네.”

 

 론은 대답 하지 않고 씩 웃었다. 그녀가 손가락을 피며 적어도 이 정도는 필요하다고 말하자 폴란은 돈을 들고 오라고 크게 소리쳤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건장한 무리가 우르르 들어왔다. 백작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네모난 가방이 탁자 위에 올려졌다. 그는 손수 가방을 열어주었다.

 

 이정도면 되는가?”

 충분하죠.”

 

 돈을 보기만하고 고개를 끄덕인 론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차를 홀짝였다.

 

 최대한 빨리 찾아줬으면 하네. 선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

 사흘 안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자신만만한 태도에도 백작은 의심을 지우지 못했다.

 론은 검은 무리를 데리고 방문을 나서는 남자를 빤히 주시하다가 문이 닫히자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가씨.”

 

 백작이 얼굴을 보일 때부터 표정이 좋지 않던 코가미가 입을 열었다. 론은 대답하지 않고 소파에 길게 누웠다. 거북한 침묵이 계속 되다가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저 돈이랑 재산을 모두 정리해줘요. 저는 잠시 눈 좀 붙일게요.”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코가미는 언제나의 답을 끝으로 론의 명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녀라면 생각이 있음에 그렇게 했겠지. 비록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위험한 일을 맡겨주지도 않지만 모두 아가씨의 방식이라 생각하는 집사였다. 그는 갈색 가죽으로 만들어진 수첩을 들고 맞은 편 소파에 앉아 가방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상당한 액수로 채워진 가방. 한 뭉치씩 꺼내 가지런히 놓으며 펜으로 적어 내려가는 자세가 익숙하다. 한동안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리는 좁은 침묵을 작은 목소리가 깨뜨렸다.

 

 코가미 씨, 저 사람 알아요?”

 

 물음의 주인공은 폴란. 뜬금없지만 서로의 신뢰와 관계의 진실성을 파헤치는 질문이었다. 코가미는 손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자선 행사로 유명한 분 아니십니까.”

 …….”

 

 망설임 없는 대답. 론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주억이고는 말이 없었다.

 탁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코가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결국 손이 멈췄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자 규칙적인 숨소리와 초침소리가 공간을 메웠다. 회색 눈이 질끈 감겼다.

 

 

 

 

 무채색 시선이 거리를 훑었다. 눈썹 사이에는 깊은 주름이 늘어섰는데, 슬그머니 잠기는 문소리가 들리자 순식간에 펴졌다. 론은 팔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고 눌러 쓴 모자를 벗었다. 정신을 차리고 다가간 코가미는 그녀가 건네는 모자를 받아들었다.

 

 됐어요.”

 ?”

 

 툭 던진 말에 듣는 이는 의미를 몰라 움직임을 멈추었는데 화자는 아무렇지 않게 그의 팔에 외투를 얹어놓고 머플러를 풀며 말을 이었다.

 

 끝났다구요. 이제 하나 남았어요.”

 

 론은 홀가분한 듯 가벼운 움직임으로 걸음을 옮겼다.

 코가미는 굉장히 혼란스러웠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움직였다. 그동안 무슨 일을 어떻게 해왔으면 이제 마지막이라는 건지.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곧장 책상 앞에 앉은 론은 부자연스러운 집사를 응시하다가 차 한 잔 내달라고 넌지시 말했다. 가벼이 휜 녹색 눈엔 그늘이 졌다.

 론은 돌아오자마자 양피지에 뭔가를 적었다. 곱게 접어 서명한 봉투에 넣고 빨간 왁스와 인장을 꺼내자 타이밍 좋게 차를 가져온 코가미가 라이터를 내밀었다. 익숙한 자세로 왁스를 녹인 론은 라이터의 생김새를 보곤 슬쩍 미소 지었다. 그녀는 식어가는 왁스에 인장을 꾹 누르며 말했다.

 

 폴란 경에게 갖다주세요.”

 

 코가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것을 알 리 없는 아가씨는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며 의자에 편히 기댔다.

 

 이게 마지막입니까?”

 마지막의 서론이에요.”

 

 그녀는 떨떠름하게 편지를 받아드는 집사가 보이지 않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향했다. 풀썩 쓰러지는 바람에 침대가 큰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코가미는 이제야 제대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 아가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외투와 모자를 챙겼다.

 

 폴란 경만 제거하면 끝이에요.”

 

 답을 바란 말이 아니라 코가미는 대꾸 하지 않았지만 문장에 포함된 어두운 의미를 깨닫고 잡았던 문고리를 놓고 론을 돌아보았다. 어느 새 잠 들었는지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어깨. 그것을 바라보는 회색 눈은 여러 감정이 뒤섞인 빛을 띠었다. 코가미는 제자리에서 머뭇거리다가 편지를 안쪽 주머니에 넣고 문을 열었다.

 문이 닫혔다. 다음 날이 될 때까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던 론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마지막 인사가 너무 칙칙하잖아.”

 

 낮게 가라앉은 시선이 닫힌 문을 향했다.

 

 

 코가미는 삼엄한 경계를 간단히 지나 폴란과 마주했다. 백작은 전 날처럼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부를 묻는 그에게 코가미는 말 대신 론이 쓴 편지를 건네주었다. 폴란은 라미스의 서명이 적힌 것을 보고 화색이 돼서 서둘러 페이퍼 나이프로 편지 봉투를 가르고 양피지를 꺼냈다. 그는 빠르게 편지를 읽고 의기양양한 태도를 보였다.

 

 이제 한 시름 놓았군. 그 쥐새끼 하나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다니.”

 

 라미스의 편지를 소중히 서랍에 넣어두고 자리로 돌아와 앉은 남자는 밝아진 얼굴로 회포를 풀자는 제안을 했다.

 

 시간을 달라고 했을 때는 쉬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네. 몇 년을 그 저택에서 썩어있었으니 우리의 정을 생각하여 허락해줬더니, 설마 그 작자의 밑에서 일하고 있었을 줄이야.”

 

 코가미는 파이프를 입에 물며 거만하게 내뱉는 백작이 달갑지 않았다. 그는 폴란에게 고용되어 꾸린 조직의 한 축을 담당했고, 수 년 전에 그의 명령 때문에 론의 저택에 들어갔다. 큰 가능성을 가진 가문의 몰락을 위해 스파이 노릇을 하고 속에서부터 좀 먹이는 역할을 맡은 그는 어느 날 이후로 제대로 된 보고를 하지 않았다. 암살을 막기 위해서였지만 결국 론의 부모님은 살해됐다. 임무 완수를 계기로 쉽게 시간을 얻은 코가미는 론을 보조하며 조직을 관둘 준비를 했다. 고용주를 배신했고, 관계를 정리하지 못했기에 그는 폴란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코가미는 배신이 들통 날 수도 있는 상황에서 평정심을 잃지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편지를 전하고 바로 돌아서도 됐지만 편지의 내용이 궁금했다. 왁스로 봉해진 편지를 흔적 없이 읽을 수 없는 노릇이라, 폴란에게서 편지의 내용을 유도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녀의 말을 그대로 따를 생각입니까?”

 어쩔 수 없지. 난 그녀의 실력이 정말 필요하다네. 자네가 그때 그 부부에게 딸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았더라면 이런 수고는 덜었을걸세.”

 

 코가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딸이라는 건…….”

 숨겨진 딸이 있었다네. 언론 때문에 지울 수 없어서 결국 낳았다는데 들키지 않으려고 눈에 안 띄는 구석진 곳에서 숨겨 키웠더군. 자네도 몰랐나?”

 

 코가미가 당황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백작은 알았다면 일찍이 보고했을 거라며 수긍했다.

 

 반응을 보니 처음 들은 것 같은데 라미스, 그 자 밑에서 일하면서도 듣지 못했나?”

 말을 아끼시는 분입니다.”

 그래 보이더군. 내게 접근했을 때도 본론만 말하고 쏙 빠져나갔거든. 그때 잡았으면 그런 거금은 안 들여도 됐을 텐데……. 아차, 어차피 돌려받을 건데 너무 신경 썼군.”

 

 론이 자신의 정체를 미끼로 백작에게 접근했다는 말에 코가미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서 그녀는 그런 위험을 감수했을까.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려는데 폴란의 의미심장한 말이 사고회로를 가로막았다.

 

 돌려받을 방법이있습니까?”

 그 딸과 라미스를 한 번에 처리할 걸세. 딸은 그 작자가 알아서 할 테고, 나는 라미스가 돈을 받으러 오는 날, 내가 그녀를 처리할 거라네. 그녀에게 너무 정 붙이지 말고, 이번 일이 끝나면 다시 자리로 복귀하게나.”

 

 충격적인 일이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쏟아지자 코가미는 앉은 자세로 굳어버렸다.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긴 그에게 폴란은 복잡한 문제지만 곧 상관없어지니 신경 쓰지 말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으로 향한 그는 서랍을 열어 편지를 꺼내 작은 종이에 뭔가를 옮겨 적었다.

 

 라미스는 나와 단 둘이 만나고 싶어 한다네. 항상 혼자 다녔으니 이번에도 고용인을 데려오지 않겠지. 그 작자의 말을 듣는 척 하다가 여기에 적힌 주소로 오게. 혹시 모르니 자네도 도와주게나.”

 

 라미스를 제거하라.

 코가미는 크게 들이마셨다가 훅 뱉어냈다. 뿌연 연기가 빗방울을 맞아 거칠게 흐트러졌다. 익숙한 얼굴의 배웅을 받으며 백작의 저택을 나온 지 꽤 됐지만 돌아가지 않았다. 그 간 꾹 눌러 참아왔던 죄책감이 터져 나와 그를 짓눌렀다. 코가미는 정처 없이 거리를 걷다가 눈앞에 아가씨와 자신이 지내는 건물이 눈에 들어오자 눈을 질끈 감고 섰다. 우산을 내려 앞을 가리고 담배 한 개비를 물고 라이터를 꺼냈다. 가로등 빛에 노랗게 빛나는 은색 지포라이터. 론이 몇 년 전 사준 생일 선물이었다. 항상 냉정한 태도로 타인에게 싸늘하게 굴던 아가씨가 수줍게 웃으며 서툴게 포장된 상자를 건네던 모습이 아른거렸다. 코가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수만가지 생각이 그의 머리를 채웠고 회색 감정이 그의 마음을 감쌌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가을의 늦은 밤, 코가미는 홀로 눅진 거리에 서있었다.

 

 

 

 

 다녀올게요.”

 

 지금까지 그래왔던 짧은 인사. 푸른 어스름이 깔린 새벽, 아가씨는 따라가겠다는 집사를 두고 혼자 밖으로 나섰다.

 폴란의 명령을 따르려면 한참 전에 출발해야 했지만 코가미는 자리를 지켰다. 그는 쉴 새 없이 폴란에게 받았던 쪽지를 손에 쥐고 정리 된 방을 배회했다.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 마음을 추스르려는 순간, 코가미의 머리를 날카롭게 찌르는 사실 하나. 라미스, 론은 백작과 단 둘이서 만나고 싶어 했는데 그 예민한 백작이 혼자 갈 리 없다. 그가 코가미를 부른 이유는 그녀의 탈출을 막기 위한 수단 하나를 추가하려고 했던 것이다.

 론이 위험하다. 코가미는 기다리라는 명령도 잊고 외투를 챙겨 밖으로 뛰어나갔다.

 쪽지에 적힌 곳에 도착했을 땐 이미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다. 코가미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망설임 없이 계단을 올랐다. 폴란의 사람들은 그를 아군으로 알고 있다. 부서진 창 사이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으며 오르는 계단엔 많은 피가 떨어져 있었다. 론의 피라고 생각했던 코가미는 바로 위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쓰러져 있자 걸음을 멈췄다. 분명 조직의 사람이다. 게다가 정신을 잃거나 잠이든 게 아닌 과다출혈로 죽은 상태였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도 코가미는 계속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오를수록 시체는 하나 둘 늘어갔다.

 3층까지 올라오자 계단이 무너져 올라갈 수 없게 돼있었다. 좁은 복도를 지나자 나오는 뻥 뚫린 공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반겼다.

 

 주인공이 오셨네.”

 

 어눌한 발음으로 말하며 씩 웃은 론은 입에서 흐르는 피를 뱉어냈다.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검은 사람들 틈에서 잘린 다리를 붙잡고 끙끙대는 백작과 기둥에 기대어 손으로 배를 감싼 론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유혈사태에 상황파악이 되지 않자 코가미는 눈살을 찌푸렸다.

 

 문 쪽에 쓰러진 사람한테 총 있죠. 딱 한 발 남았을 거예요. 그걸로 나나, 저 사람 머리에 박아 넣으면 돼요.”

 

 힘겹게 말을 잇는 아가씨를 흔들리는 눈으로 주시하는 코가미. 이것도 저것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것뿐이었다.

 

 아가씨…… 이게 어떻게 된

 코가미! 당장, 당장 저 년을 죽여 버려! 저것이 이 몸을 이렇게 만들었다네!”

 

 이유를 묻는 코가미에게 명령조로 소리치는 폴란. 침을 튀기며 피 묻은 손으로 론을 삿대질하는 그의 말은 들리지 않는지, 코가미는 느린 움직임으로 론과 폴란을 바라봤다. 그의 다리는 어디서 잘린 것일까. 론은 어디서 다친 걸까, 왜 다친 걸까. 조직 사람 여럿은 왜 죽어있지? 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일단 총부터 들어요.”

 

 론의 말이었다. 말을 따르면 모두 설명해주겠다는 분위기에, 코가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문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손에 총이 있었고, 탄이 한 발 남았다. 탄환을 확인하고 다시 장전하는 그를 보고 론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모든 위협을 처리한다.”

 

 중상을 입었는지 말하기 힘겨워보였지만 론은 웃음을 잃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가문의 복수를 한다느니, 부모님의 원수를 죽인다느니 이런 게 아니라 내 삶의 위험분자를 없애는 게 목적이었어요. 처음에, 저택을 떠나기 전에 관련 정보를 싹 모았어요. 사람, 사건, 재산, 정보 등등 모두 다.”

 빨리 쏘라니까 뭐하는 건가, 코가미! 저것을 어서

 

 다가가지도 멀어지지도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론의 얘기에 귀 기울이던 코가미는 백작이 계속 소리치며 발악하자 총구를 겨누었다. 그는 억울한 표정으로 찍 소리 못 내는 폴란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녹안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 중에 코가미 씨도 포함돼 있었어요. 왜인지는 아시죠?”

 

 코가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터 알고 있었어요. 코가미 씨는 스파이였고, 가문과 부모님이 그렇게 된 건 코가미 씨의 책임도 있었다는 거. 그래서 계획 안 알려준 거예요. 뭐 하는지, 왜 하려는지. 근데저택을 떠날 때부터 코가미 씨가 따라오는 걸 내치지 않았던 건…….”

 

 천천히 읊조리던 론은 말을 멈추고 거칠게 기침했다. 뜨끈한 핏줄기가 입가에서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코가미는 불안한 얼굴로 그녀를 주시하다가 한 걸음 내딛고는 다시 자리에 멈춰 섰다. 그는 어떤 이유에선지 다가가는 걸 망설였다.

 

 코가미 씨를코가미 씨가 필요했어요. 코가미 신야라는 사람이필요했어요, 나한테는.”

 

 론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함께 하고 싶은데, 그건 내 욕심이니까 여러 가지 시험 해봤어요. 말 안 하던 계획도 던져주고, 그거 말하라고 고용주 만나게 해주고, 자유가 될 수 있게 도망갈 시간도 줬죠. 하지만말도 안 하고, 이번엔 명령도 어기고 여기까지 찾아왔네요. 이건무슨 뜻이에요?”

 

 나 기대해도 돼요? 힘없이 말하며 웃는 론은 그 순간만큼은 행복해보였다.

 코가미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입만 달싹이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론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까 말했죠. 마지막 선택이에요. 그 총으로 폴란을 쏘든가, 나를 쏴요. 그리고 당신의 주인을 데리고 계단을 내려가서 뒷문에 있는 마차를 타세요.”

 

 론은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숨을 얕게 쉬는 걸 보면 위급한 상태였다.

 여기까지가 자신이 준비한 계획이라는 말에 코가미는 혼란스러웠다. 그는 처음 명령을 받고 저택에 들어갔을 때부터 아가씨와 저택을 빠져나와 한 나라의 사회를 휘저은 것을 모두 떠올렸다. 그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석고상처럼 자리에 서서 생각을 정리하던 코가미는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갈라진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가씨, 저는제 주인은 그 이후로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래, 저 여자를

 

 총성이 울렸다. 사방이 조용해졌다.

 침묵으로 가라앉은 공간에서 홀로 서있던 코가미는 총을 버리고 걸음을 옮겼다. 기둥에 죽은 듯 누워있는 아가씨에게 자신의 외투를 덮어주고 단단히 안아들었다.

 살며시 눈을 뜬 론은 놀란 얼굴로 코가미를 올려보다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제가 할 말입니다.”

 

 누가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코가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주인이어도 괜찮냐는 말이었어요.”

 말했잖습니까.”

 

 반문하는 론이 씁쓸한 표정으로 주눅 들자 코가미는 슬쩍 웃으며 아가씨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제 주인은 당신 한 사람뿐입니다.”

 

 론은 멍하니 있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닫고 잔뜩 부끄러워했다. 그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가. 그의 품에서 꿈틀거리며 부끄러움과 싸우던 그녀는 날카로운 고통에 작은 신음을 냈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던 코가미도 덩달아 심각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색이 창백합니다.”

 괜찮─….”

 병원부터 가겠습니다.”

 

 으름장과도 같은 선언에 론은 입을 꾹 늘렸다가 힘 빠진 목소리로 수긍했다.

 코가미는 론을 안아들고 빠르게 전쟁터 같은 곳을 벗어났다. 삭막한 공간에 남은 유일한 온기가 차게 식어갔다.

 론의 말대로 뒷문으로 나가자 바로 앞에 갈색 말 두 마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코가미는 녹색 마차 안에 아가씨를 눕혀놓고 말 뒤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천천히 출발하며 물었다.

 

 다치는 것도 계획에 있었습니까?”

 

 코가미의 외투를 덮고 웅크리고 있던 론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뒤 대답했다.

 

 있긴 했죠. 이렇게 죽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았어요.”

 그 많은 인원을 어떻게 상대하셨습니까.”

 방법이 있죠.”

 

 코가미 씨가 가르쳐줬어요. 늘어진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갔다. 어눌한 말을 용케 알아들은 코가미는 기억 못 하는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다시 물어보려고 했지만 론이 환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질문은 아가씨가 다 낫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는다. 그들의 시간은 많다.





















'2F 서재 > PSYCHO-PAS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야론 셰프au  (0) 2017.06.22
카논 님 편지 커미션  (0) 2017.04.05
포스트 아포칼립스au 합작 :: 코가미 신야  (0) 2016.11.07
오필리아 님 글 커미션  (0) 2016.10.17
판타지 합작 :: 코가미 신야  (0) 2016.06.01